딸에게
- 오세영
가을바람 불어
허공의 빈 나뭇가지처럼 아빠는
울고 있다만 딸아
너는 무심히 예복을 고르고만 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붙들지 못해서 우는가 보다.
강변의 갈대는 흐르는 물을, 언덕의 풀잎은
스치는 바람을 붙들지 못해
우는 것, 그러나
뿌리침이 없었다면 그들 또한
어찌 바다에 이를 수 있었겠느냐.
붙들려 매어 있는 것치고
썩지 않은 것이란 없단다
안간힘 써 뽑히지 않은 무는
제자리에서 썩지만
스스로 뿌리치고 땅에 떨어지는 열매는
언 땅에서도 새싹을 틔우지 않더냐
막막한 지상으로 홀로 너를 보내는 날,
아빠는 문득 뒤꼍 사과나무에서
잘 익은 사과 하나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 시집 《시간의 쪽배》(2005) 수록
그런데 화자인 아버지는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나타낸다. ‘뿌리침이 없었다면 그들 또한/ 어찌 바다에 이를 수 있겠느냐’라고. 이것은 딸의 결혼을 자연의 순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대 전환이다. ‘뿌리침’과 ‘놓아줌’이 있었기에 ‘바다’라는 새로운 세상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란 깨달음을 얻은 화자는 ‘붙들려 매여 있는 것치고/ 썩지 않는 것이란 없단다’라며,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스스로 위로한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썩는 ‘무’와 비교하며, ‘스스로 뿌리치고 땅에 떨어지는 열매’가 ‘언 땅’과 같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새싹’을 틔우는 비유를 통해 슬픔의 극복을 위해 애쓰는 아빠의 심정을 드러내며, 한편으로는 딸의 새로운 출발에 응원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화자가 인식의 전환을 통해 서운함과 허전함을 새로운 의미로 상쇄시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딸의 결혼을 마냥 슬피 하기만 하던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딸의 새 인생에 대해 축복해 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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