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2
- 오세영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 시집 《문 열어라 하늘아》(2006) 수록
◎시어 풀이
*형형(炯炯)한 : 반짝반짝 빛나서 밝은.
*낱알 : 곡식 따위의 하나하나 따로따로의 알.
▲이해와 감상
‘자화상(自畵像)’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과정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적은 글이다. 이 시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2006년에 간행한 시집 《문 열어라 하늘아》에 수록한 작품이다. 이때 시인의 나이는 64세, 시집은 통산 열다섯 번째로 발행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인은 같은 제목의 <자화상>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간의 연륜을 살아오면서 다시 자신의 삶을 다짐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철저하게 검은 까마귀의 모습을 통해 조금의 부정도 용납하지 않는, 진실하고 순수한 삶을 살고 싶은 바람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대상을 의인화하여 시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이 시는 대조적 소재를 사용하여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색채 대비를 통해 시인이 지향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먼저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라고 한다. 여기서 시적 대상인 ‘까마귀’는 고고한 존재이며, ‘까치’는 세속적인 존재로 서로 대조되는 대상이다. 이어 시인은 까치와의 대조를 통해 ‘까마귀’의 고고한 자세를 드러낸다. 마른 나무 끝에 앉아 설원을 굽어보는 고고한 자세, 광채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 고독한 이마, 날카로운 부리 등 결코 범상치 않은 외양 묘사를 통하여 꼿꼿한 시인이 되고자 한다. 외로워도 좋고, 부리가 날카로워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이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人家)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라고 하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생존이나 영달을 위하여 속된 세상과 세속적인 것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철학을 강하게 드러낸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 이만한 각오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듯, 진실이 덮이고 허위와 거짓이 점철되는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도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196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중진 시인이지만 국내 문단의 주류 계파와 거리를 두고 독자적 길을 걸어왔으며,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도 64세 때인 2006년 제35대 한국시인협회장에 추대된 것 외에는 이른바 ‘감투’를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시는 연륜을 지닌 시인이 앞으로도 세속적인 것을 탐하지 아니하고, 고결하게 자신의 모습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작자 오세영(吳世榮, 1942 ~ )
시인.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 <잠 깨는 추상>으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다가 동양 사상, 즉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여 현대 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하였다. 이후에는 절제와 균형이 미덕인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無名戀詩)》(1986),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시간의 쪽배》(2005), 《문 열어라 하늘아》(2006), 《가을 빗소리》(201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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