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거제도(巨濟島) 둔덕골 / 유치환

by 혜강(惠江) 2020. 7. 23.

 

<사진 : 거제도 둔덕골 유치환 생가>

 

 

거제도(巨濟島) 둔덕골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造藥)*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 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七寸)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 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父祖)의 묏가에 부조(父祖)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父祖)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 시집 《울릉도》(1947) 수록

 

 

◎시어 풀이

 

*부조(父祖) :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는 조상.

*다가솟은 : 가까이 솟은.

*알로 : ‘아래로’의 방언

*두락(斗落) : 마지기. 한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면적. 평지, 산지, 토지의 비옥도 등에 따라 다름. 보통 논은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이라 함.

*박토(薄土) : 매우 메마른 땅. ‘옥토(沃土)’의 반대

*조약(調藥) : 약을 조제함.

*사시장천 : 사철 내내 끝없이 잇닿아 멀고도 넓은 하늘. ‘사시장철’(사철 중 어느 때나 늘)이 아닐지?

*신농(神農) : 옛날 농사업, 의료, 교역 등을 민간에 가르쳤다는 중국의 신.

*길쌈 : ‘길쌈’의 사투리. 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모든 일.

*데불고 : ‘데리고’의 방언

*호연(浩然)한 : 넓고 큰.

*왕고모부 : 대고모부. 고모할아버지(아버지의 고모부를 이르는 말).

*증손(曾孫) : 손자의 아들. 증손자.

*애석(愛惜) : 사랑하고 아깝게 여김.

*날세고 : ‘날새고’의 방언. 날만 새면 논밭으로 일하러 나갔다는 말.

*불혹(不惑) : 나이 ‘마흔 살’의 일컬음

*일출이경 : ‘해 뜨면 일한다.’는 뜻으로 농사짓는 일을 이르는 말. ‘일출이경 일몰이식(日出而耕 日沒而息)에서 온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조상이 대대로 ‘거제도 둔덕골’에서 살아온 조상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자기도 고향인 거제도 둔덕골로 들어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던 방식대로 자연과 역사의 이치에 순응하며 어질게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향토적인 시어와 사투리를 활용하여 토속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연물에 빗대어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직유법을 사용하여 심상을 구체화하면서, 영탄적 표현을 통해 화자의 깨달음을 부각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1연에서, 고향인 ‘거제도 둔덕골’을 ‘팔대로 내려 나의 부조의 살으신 곳’이며,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온 곳이며,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자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사시장천 벗고 섰는 산비탈 모양’이며, 지금도 베틀에 길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호연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와 천하를 논하는’ 어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척박한 고향 땅에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도 옛날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호연한 기풍로 학문과 정치를 논한 의연하게 살아가는 ‘왕고못댁 왕고모부’가 있는 곳이다. 이러한 묘사를 종합하면 둔덕골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친족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에서 보는 것처럼, 젊은 증손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찾아 해외로 떠났던 것으로 보아 힘들었던 당대의 세태와 함께 그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2연에 와서 시적 화자는 ‘두고두고 행복한 바람이 불어왔던가’라며 물질적 삶이 궁핍하여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인정한 화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들이 살아 온 공간으로 돌아와 그들이 살았던 삶의 태도를 지켜가면서 살다 죽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반전(反轉)이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로 살아왔던 화자로서는 ‘왕고못댁 왕고모부’처럼 가난하지만 ‘호연한 기풍 속에’서 ‘사서와 천하를 논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3연의 ‘일출이경하고(해 뜨면 밭 갈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라는 표현에 이르면, 불혹(不惑)의 나이에 들어선 화자로서는 ‘부조의 하늘’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사를 갖게 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화자에게 고향 ‘둔덕골’은 새로운 삶에 대한 활력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화자는 가파른 문명적인 삶보다는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는, 고향에서의 순수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할 수 있다.

 

 

▲작자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시인, 교육자. 경남 통영 출생.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이른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한결같이 남성적인 묵직한 어조로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와 생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첫 시집 <청마시초>(1939)를 시작으로,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7),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종군시집, 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선》(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동문 앞에서 / 유하  (0) 2020.07.24
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 유하  (0) 2020.07.24
채전(菜田) / 유치환  (0) 2020.07.23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0) 2020.07.22
키 / 유안진  (0) 2020.07.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