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문 앞에서
- 유하
이제 어디를 가나 아리바바의 참깨*
주문 없이도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 세상이다.
언제나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어디선가 전자 감응 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 순간,
스르르 문이 열리고 스르르 우리들은 들어간다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들어가고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나오고
그때마다 우리의 손은 조금씩 퇴화*하여 간다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만 봐야 하는
날개 없는 키위새*
머지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
- 시집 《무림일기》(1989) 수록
◎시어 풀이
*아리바바의 참깨 : '열려라 참깨'는 천일야화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에 나오는 주문인 ‘열려라 참깨!’를 인용한 말. 도둑들이 보물을 숨겨둔 동굴 앞에서 이 주문을 외우면 문이 열리는 데서, 이 주문은 ‘문 여는 주문’의 대명사쯤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흉(陰凶)한 : 마음이 음침하고 흉악한.
*퇴화(退化) : 진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 퇴행(退行).
*멀뚱멀뚱 : 생기가 없고 멀건 눈알을 자꾸 굴리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양.
*키위새 : 뉴질랜드의 천혜의 환경에서 천적 없이 풍요롭게 살면서 날개가 퇴화된 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동문’과 같은 현대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퇴화할 것임을 날지 못하는 ‘키위새’에 비유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우리’로 자동문을 보면서 현대 문명에 익숙해져 자력을 잃은 ‘우리’(현대인)의 삶을 비판하면서 자력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키위새’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는 다양한 음성 상징어를 사용하여 감각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대구법, 반복법을 사용하여 운율을 형성하고, 시행 배치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화자는 1~3행에서 모든 것이 자동화·기계화된 현실을 ‘자동문’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주문 없이도 저절로 열리는’은 자동문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이 없어도 열린다는 뜻으로,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필요 없을 정도로 편리해진 세상의 단면을 드러낸다.
이어 4~7행에서는 현대인이 기계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선가 전자 감응 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라고 한다. 이것은 자동문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부정적 속성을 ‘날름날름’이라는 음성 상징어를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기계화된 현대 문명의 유혹을 활유법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8~13행에서는 기계 문명에 길들어져 퇴화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날개 없는 키위새’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먼저 화자는 ‘스스로 문이 열리고 스스로 들어가고/ 스르르 열리고 스스로 나오고’라는 표현은 ‘스르르’라는 음성 상징어와 대구법, 반복법을 사용하여 자동문에 길들여진 모습을 실감 있게 표현한 것으로, 자동문에 길들여 갈수록 ‘우리의 손은 조금씩 퇴화되어 간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간은 ‘날개 없는 키위새’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머지 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날개 없는 키위새’는 현대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어져 주체성을 잃고 퇴화해 버린 현대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마지막 14-18행에서 화자는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올고만 있을 것이다’라고, 기계의 도움이 불가능한 그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경고한다. 여기서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상황은 기계의 도움이 불가능한 어떤 상황을 상정한 것이며,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현대 문명에 길들어져 수동적이고 나약해져 버린 현대인의 모습이며, 그런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문 앞에서는’과 같이, 시행을 독립시켜 행갈이를 한 것은 시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다.
결국, 이 시는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첨단기술과 문명의 이기(利器)에만 익숙해져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상실해 가는 현대인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미래에는 ‘날개 없는 키위새’와 같이 인간의 주체적 역량과 의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참고: 세계 명작 동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6세기 경 페르시아의 설화이며, 동양권에서는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라고도 불리는 동화 작품이다. 가난하고 성실한 나무꾼 알리바바가 우연한 기회에 무스타파 도둑의 일당이 보물을 숨겨둔 동굴에 들어가 그 일부를 집으로 가져온다. 그의 돈 많은 형 카심이 그 비밀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지만, 주문을 잊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도둑들에게 살해된다. 40인의 도둑은 알리바바까지 죽이려고 하지만, 램프의 요정인 시녀 마르지나의 지혜와 용기에 의해 구출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이 유명하다.
▲작자 유하(1963 ~ )
본명은 김영준. 시인. 영화감독. 전북 고창 출생.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풍자와 반어로 낙후한 현실 정치와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한 시를 주로 썼다.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으로 《무림일기》(1989),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 《세상의 모든 저녁》(199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1999), 《천일馬화》(2000) 등이 있다. <시인 구보씨의 하루>로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하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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