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 할머니의 오징어
- 유하
뼈가 있는 연체동물*인 것을
죽도에 가서 알았다.
온갖 비린 것들이 살아 펄떡이는
어스름의 해변가
한결한결 오징어 회를 치는 할머니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 수 있을까
옛날 떡장수 어머니와
천하 명필의 부끄러움
그렇듯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돌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
나의 시는 어떤가?
오징어 회를 먹으며
오랜만에 내가, 내게 던지는
벼 있는 물음 한 마디
- 시집 《무림일기》(1989)
◎시어 풀이
*연체동물(軟體動物) : 뼈가 없고 부드러우며 근육이 풍부함. 모두 유성(有性) 생식이고 대부분이 물에서 사는 동물임(문어·조개 따위)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화자는 ‘죽도’에서 할머니가 ‘오징어’ 회를 능숙하게 써는 모습을 보면서 기계처럼 시를 쓰는 화자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죽도에서 오징어 회를 써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치열하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감탄을 보내면서 자신의 시를 쓰는 모습에 부끄러움과 반성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할머니와 ‘나’라는 두 대상의 대조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한석봉의 일화를 제시하여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는데, 역설적인 표현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설의적 표현을 통해 대상에 대한 감탄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화자는 죽도에 가서 오징어에 뼈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래 연체동물은 뼈가 없는 것인데, ‘뼈가 있는 연체동물’이라고 사실(진리)와 어긋나는 진술을 함으로써 역설적인 표현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드러낸다.
이어 화자는 어스름의 해변가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오징어 회를 썰어내는 할머니의 솜씨를 ‘저토록 빠르게, 자로 잰 듯 썰어낼 수 있을까’라는 설의적인 표현으로 감탄하며, 한석봉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하여 할머니의 회 써는 솜씨를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모습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한석봉으로 대치하여 기계처럼 시를 쓰는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강조하여 드러낸다. 나아가 화자는 ‘어둠 속 저 할머니의 손놀림이/ 어찌 한갓 기술일 수 있겠는가’라는 설의적 표현으로 할머니의 손놀림이 한갓 기술만이 아닌, 생생하고 치열한 삶에서 터득된, 혼(魂)을 담은 솜씨임을 강조하여 다시 한번 할머니의 솜씨에 경외김을 느끼며 예찬한다.
그러면서 화자는 ‘어스름 해변가’에서 회를 썬 할머니와는 달리 ‘안락한 의자 환한 조명’ 아래서 시(詩)를 쓰고 있는 자신을 대조시키면서 ‘나의 시는 어떤가?’ 자문한다. 자신의 시에 대한 이와 같은 의문의 표시는 다름 아닌,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에 대한 ‘뼈 있는 물음’을 통하여 마치 기계처럼 안일하게 시를 써 온 삶에 반성의 자세를 드러내고 자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새롭게 깨닫는다.
이 시는 시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과연 나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뚜렷한 목표도 없이, 목표는 설정해 놓고도 너무 안이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작자 유하(1963 ~ )
본명은 김영준. 시인. 영화감독. 전북 고창 출생.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풍자와 반어로 낙후한 현실 정치와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한 시를 주로 썼다.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으로 《무림일기》(1989),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 《세상의 모든 저녁》(199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1999), 《천일馬화》(2000) 등이 있다. <시인 구보씨의 하루>로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하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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