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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채전(菜田) / 유치환

by 혜강(惠江) 2020. 7. 23.

 

 

 

 

 

채전(菜田)

 

 

 

- 유치환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수염을 드리운 몇 그루 옥수수에 가지, 고추, 오이, 토란, 그리고 울타리엔 덤불*을 이룬 넌출* 사이로 반질반질 윤기 도는 크고 작은 박이며 호박들!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은 제각기 타고난 바탕과 생김새로 주어서 아낌없고 받아서 아쉼 없는 황금의 햇빛 속에 일심으로 자라고 영글기에 숨소리도 들릴세라 적적히* 여념* 없나니. 과분하지* 말라 의혹하지 말라 주어진 대로를 정성껏 충만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족할 줄을 알라 오직 여기에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에 있거니.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나비가 심방(尋訪)* 오고 풍덩이가 찾아오고 잠자리가 왔다 가고 바람결에 스쳐 가고 그늘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햇볕이 다시 나고…… 이같이 많은 손님들의 극진한 축복과 은혜 속에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의 지극히 충족한 빛나는 생명의 양상*을 한여름 채전으로 와서 보아라.

 

 

               - 《청마 유치환 시전집》4(국학자료원, 2008) 수록

 

 

◎시어 풀이

 

 

*채전(菜田) : 심어서 가꾸는 채소밭. 남새밭. 채마(菜麻)밭.

*덤불 :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수풀.

*넌출 : 길게 벋어나가 늘어진 식물의 줄기(등·다래·칡 따위의 줄기).

*범속(凡俗)한 : 평범하고 속된.

*적적히 : 외롭고 쓸쓸히, 고요하고 조용히.

*여념(餘念) : (주로 ‘없다’와 함께 쓰여) 딴생각.

*과분하다 : 분수에 넘치게 좋다.

*유열(愉悅) : 유쾌하고 기쁨.

*심방(尋訪) : 방문해서 찾아봄

*양상(樣相) : 생김새. 모습. 모양.

 

 

 

▲이해와 감상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 <채전>은 채소밭을 제재로 하여 채소밭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평범한 것이 지닌 생명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2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비슷한 두 연을 채소와 곤충으로 대비시키고, 각 연은 공통적으로 ‘보아라’, ‘말라’ 등 명령형 어미를 반복하여 운율을 형성하면서 이 시 전체가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소재를 열거하여 만물의 조화와 생명력을 잘 드러냈다. 그리고 ‘없나니’, ‘있거니’처럼 고어체 표현이나 문어체 어휘를 사용해서 독자가 화자의 말을 경청하도록 하고, 만연체의 문장을 사용해 화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의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지시하는 문장을 먼저 제시하고 뒷 문장에 ‘없나니’, ‘있거니’와 같은 문장을 배치하면서 도치법이 사용되고 있다.

 

 1연에서는 채소밭에서 느끼는 자족(自足)의 미덕(美德)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첫머리에서 명령조의 어조로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라고 한다. 화자는 채전의 각종 채소를 열거하여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이 햇빛을 받아 제각기 타고난 바탕과 생김새 그대로를 가지고 주어진 대로 자기 나름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야말로 생명이 충일(充溢)한 모습들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과분하지 말라, 주어진 대로 정성껏 충만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족한 줄을 알라’고 한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족한 줄 아는 것에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2연은 여러 채소를 열거한 1연과는 달리, 한여름의 채소밭에 찾아온 손님들 즉 나비, 풍뎅이, 잠자리 등의 곤충들이 채전에 활기를 더하고, 여기에 바람, 그늘, 비, 햇볕 등 적당한 기후 조건이 함께 어우러져 생명력을 발산하는 채소밭에 ‘극진한 축복과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극히 범속한 것들의 지극히 충족한 빛나는 생명을 양상’을 한여름 채전으로 와서 보라고 한다. 이것은 축복과 은혜 속에 무르익는 채소밭의 생명력을 노래함으로써 범속한 것들이 가지는 소중한 가치에 대해 예찬하고자 하는 화자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지극히 평범한 채소들과 작은 곤충들 그리고 일상적으로 변화는 기후환경 등에서 생명력의 발현과 자연 만물의 조화를 발견한다. 이는 생명파로 활동한 시인의 시 세계의 특징과도 관련된다. 시의 기교보다는 생명력의 충일을 지향한 그는 이 시에서도 범속한 일상의 주변적인 것들에서 오히려 만물의 조화와 지극한 충족의 기쁨을 느끼고 있음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시인, 교육자. 경남 통영 출생.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이른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한결같이 남성적인 묵직한 어조로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와 생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첫 시집 <청마시초>(1939)를 시작으로,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7),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종군시집, 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선》(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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