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by 혜강(惠江) 2020. 7. 22.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께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 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 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春川)이니까.

 

 

-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2008)

 

 

◎시어 풀이

 

*무릉도원(武陵桃源) : 중국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이상향.

*연고(緣故) : ① 사유(事由). ② 혈통·정분 또는 법률상으로 맺어진 관계. 또는 그런 관계가 있는 사람. ③ 인연.

*발치 : 어떤 장소나 건물의 아랫부분이나 끝부분.

*움미나리 : 새로 싹이 돋아나는 미나리.
*께벗은 : ‘발가벗은’이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

*느닷없이 : 무엇이 나타남이 전혀 뜻밖이고 갑작스럽게.

*엄두 : 감히 무엇을 하려는 마음.

*아지랑거리는 : 아른아른 움직이는 현상이 계속되는. ‘아지랑이’의 방언인 ‘아지랑’에 ‘그런 상태가 잇따라 계속됨’의 뜻을 더하고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거리다’가 덧붙은 말.

*실루엣 : 창문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 또는 불빛에 비친 물체의 그림자.
*꽃다지 : 우리나라의 들판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식물. 봄에 하나의 가지에서 여러 송이의 노란 꽃이 달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춘천’이라는 도시를 소재로, ‘춘천’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을 평소 가지고 있던 다양한 시적 상상과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춘천’에 대한 동경과 기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춘천’이라는 지명을 통해 봄을 연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계절 모두 춘천을 봄의 도시로 인식하는 시적 상상력과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이 시에서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춘천'은 실제 존재하는 도시이자 지명이지만, 시인은 지명에서 연상된 이미지를 활용하여 이것을 자신만의 독특한 발상과 개성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환기하여 ‘~듯’, ‘~같다’, ‘~거라’, ‘~지’ 등의 구어체의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정서적 상상력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연에서는 여러 지명에 사용된 한자와 관련된 계절이나 의미를 환기하여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다양한 지명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로 상상력을 촉발한다. 이렇게 지명에서 촉발된 시인의 상상력은 2연에서 '춘천'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발상과 개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특히 시인의 '춘천(春川)'에 대한 이미지는 '춘(春)'이라는 글자가 주는 '봄'의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예컨대, 얼음 풀리는 냇가에 미나리의 새파란 싹이 돋을 거라는 둥, 마른 억새의 발가벗은 가지 사이에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는 둥, 새봄 한 아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둥,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올 것이라는 둥 봄이 오는 춘천에 가 보고 싶지만 정작 가 보지 못한 ‘춘천’을 대상에 대한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인식을 시인 나름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3연에서 시인은 여름, 가을의 춘천도 항상 봄일 것이라 상상하고 있다. 즉 여름날의 ‘소낙비’를 봄에 내리는 이슬비로, 가을날의 ‘단풍’도 봄의 ‘봄나물’과 ‘꽃다지’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귀도 눈이 되지’라는 시구를 통해 ‘봄’이 보이는 것이 충만해 있는 ‘눈(目)의 계절’이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는 모순된 표현이지만, 시적 화자가 낙엽과 바람 소리의 계절인 가을마저도 파릇파릇한 새싹과 화려한 꽃들을 눈으로 인식하는 봄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봄으로 화(化)한 춘천의 사계절에 대해 상상을 하며, 춘천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을 따라가다 보면, '춘천'은 이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강원도 ‘춘천’의 실재적 공간이 아니고, 시인의 정서적 상상력으로 채색된 공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걸리버 여행기’나 ‘이상한 나리의 앨리스’에 나오는 상상의 공간, 즉 실재(實在)하지 않는 세계를 가리킨다. 다만 시인이 마음속으로 동경하는 공간일 뿐이다. 결국, 이 시에 제시된 ‘춘천’은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셈이다.

 

 

▲작자 유안진(柳岸津, 1941~ )

 

 

  시인. 경북 안동 출생. 1965년 《현대문학》에 <달>과 <위로> 등으로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여성의 삶을 깊이 응시하는 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시 등 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달하》(1970), 《절망시편》(1972), 《물로 바람으로》(1976), 《그리스도 옛 애인》(1978), 《날개옷》(1981), 《꿈꾸는 손금》(1985), 《달빛에 젖은 가락》(1985), 《약속의 별 하나》(1986), 《풍각쟁이의 꿈》(1987), 《남산길》(1988),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1993), 《누이》(1997), 《봄비 한 주머니》(2000), 《다보탑을 줍다》(2004), 《거짓말로 참말하기》(200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제도(巨濟島) 둔덕골 / 유치환  (0) 2020.07.23
채전(菜田) / 유치환  (0) 2020.07.23
키 / 유안진  (1) 2020.07.22
성탄제 / 오장환  (0) 2020.07.21
고향 앞에서 / 오장환  (0) 2020.07.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