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성탄제 / 오장환

by 혜강(惠江) 2020. 7. 21.

 

 

성탄제

 

- 오장환

 


산 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듯한 핏방울…… .

 

    - 《조선일보》(1939.10.24.) 게재

 

◎시어 플이

*몰이꾼 : 짐승 따위를 잡기 위해 몰이를 하는 사람.

*이슥히 : 밤이 꽤 깊도록.

*아슬하다 : 1.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느낌이 있다. 2. 일 따위가 잘 안 될까 봐 두려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마음이 약간 위태롭다. 3. 아찔아찔할 정도로 높거나 낮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산속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에서 드러난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하는 동시에 생명의 순결성 회복에의 소망을 드러낸 작품이다. 화자는 어미 사슴이 죽어가고 그 곁을 어린 사슴이 지키고 있는 모습을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보며,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성을 비판하고 생명의 순결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시어와 색채, 감각의 대비를 통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은 눈 내리는 밤, 어두운 숲이 산밑까지 울창하게 이어진 어느 조그만 산동네이다. 포수는 몰이꾼들과 함게 사냥개를 데리고 며칠씩 잠을 자며 사냥을 한다. 몰이꾼은 보통 그 마을 사람들이 맡는다. 마을 사람들은 사냔감 몰이를 해 죽고 하루 일당을 받거나 일당 대신 고기를 얻어가기도 한다. 이런 풍경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흔한 풍경이었다.

 1연은 ‘산 밑까지 내려온 숲에서 피를 흘리며 쫓기는 사슴의 급박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어두운 숲’은 생명이 위협받는 공간이며,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생명을 노리는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이라는 표현은 흰색과 빨간색의 색채 대비, 차가움과 따뜻함의 촉각의 대비를 통해 잔혹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연에서는 몰이꾼이 골짜기와 비탈을 내려와 넓은 언덕에 이르도록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인간들의 집요한 추격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연은 뭇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포수와 사냥개’를 동원하여 결국 ‘표범과 늑대’를 희생시키는 위협적인 존재에 대한 ‘나어린 사슴’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포수와 사냥개’는 폭력적인 존재인 강자(强者)를 의미하며, 그에 희생되고 있는 ‘표범과 늑대’는 폭력에 희생된 존재, 즉 약자(弱者)를 의미한다. 그리고 폭력에 의하여 희생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 어린 사슴’ 역시 약자인 것이다.

 4연에 와서, 화자는 ‘나어린 사슴’으로 하여금 어미 사슴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을 꿈꾸어 본다. 어린 사슴은 다급한 나머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는 행동을 한다. 이것은 어미를 살리려는 어린 사슴의 치유(治癒) 행위이다. 그리고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를 떠올린다. 여기서 ‘어두운 골짝’, ‘깊은 골’은 절망적 상황이며, ‘샘’과 ‘약초’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미 사슴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을 상징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턱밑에 이른 참혹한 현실에서도 화자는 희망을 꿈꾸는 것이다.

 5연은 화자는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이로 하여금/ 죽은 이를 묻게 하라’라고 하며, 비참한 죽음이 계속되는 것을 통하여 폭력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는 상황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어미 사슴 곁에서 떠날 줄 모르는 어린 사슴에게는 참을 수 없는 소리다. 아주 가까운 곳에 몰이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고 한다. 이 말은 이제까지 죽은 희생자로 하여금 앞으로 희생될 이들을 묻게 하라는 것을 통해 생명의 희생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말이 성서에 나오는 말-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8장 22절)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 속에는 어떤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성서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제자를 향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즉 이 말은 세속적인 일은 세속에 맡겨두라는 말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무엇보다 성스럽고 막중하므로, 이것을 세속의 일과 경중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여기 인용한 것은 죽어가는 어미를 어린 사슴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죽어가는 사슴을 위해 더 이상 머무를 필요 없이 어린 사슴은 이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성탄제’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볼 때, 사냥꾼과 사냥감이 쫓고 쫓기는 세상을 끝내고, 일제 하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사랑과 화해를 바탕으로 평화의 나라 건설에 나서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제>는 폭력에 의한 ‘피의 제전’이 아닌, 사랑의 정신으로 벌이는 ‘화해의 마당’이 진정한 성탄을 축하하는 일이어야 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지막 6연은 죽음의 세계로 가는 어미 사슴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눈(雪) 위로 따뜻한 피와 눈물이 흐른다면서 말없음표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 시 ‘성탄제’는 일제의 억압이 더욱 격렬해지던 1930년대 후반의 작품이다. 사냥꾼의 총에 맞은 엄마 사슴과 곁에서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어린 사슴을 통해 당시 자행되던 인간의 비정함을 고발하는 동시에 폭력이 아닌 사랑과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시대에 대한 기대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작가 오장환(吳章煥 1918 - ? )

  시인. 충북 보은 출생. 1931년 《조선 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문명 비판적인 시와 보들레르적인 시를 많이 썼다.

  그러나 1940년 이후에는 서정적 사색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시를 썼다. 해방 후 선명한 정치 노선을 드러내며 참여적인 시를 활발하게 발표하였고, 그 뒤 월북했다. 시집으로 《성벽》(1937), 《헌시》(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등을 간행하였다.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오장환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0) 2020.07.22
키 / 유안진  (1) 2020.07.22
고향 앞에서 / 오장환  (0) 2020.07.21
ㅁ놀이 / 오은  (0) 2020.07.20
자화상 2 / 오세영  (0) 2020.07.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