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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767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도종환 시인의 은 ’흔들리며 피는 꽃‘에 빗대어, 인간의 삷 또한 그러하다는 이치를 평범한 시어로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꽃’은 흔들리며 피고, 젖으며 핀다. 다시 말하면 무수한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꽃이 피듯, 우리의 삶 또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완성됨을 말하고 있다. 인.. 2020. 5. 14.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소한*이 가까워지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져 그대 말대로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빛난다 나도 그대처럼 꺾인 나무보다 꼿꼿한 어린 나무에 더 유정한* 마음을 품어 가지를 매만지며 눈을 털어 낸다 이미 많은 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잔가지로 성글게* 엮은 집에서 내려오는 텃새들은 눈 속에서 어떻게 찬 밤을 지샜을까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깨어 어깨를 털고 서 있는 버즘나무 백양나무 열매를 많이 달고 서 있던 까닭에 허리에 무수히 돌을 맞은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에 가려 똑같이 푸른 빛을 잃지 않았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측백나무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발 아래 밟히며 부서지.. 2020. 5. 14.
못 위의 잠 / 나희덕 못 위의 잠 - 나희덕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체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2020. 5. 14.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 2020. 5. 13.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 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 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사라진 손바닥》(2004) 수록 ◎시어 풀이 *출토(出土) : 유물 등이 땅속에서 나옴. 또는 그것을 .. 2020. 5. 13.
푸른 밤 / 나희덕 <출처 : 다음카페 '문학광장'>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2020. 5. 13.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 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 시집 《그곳이 .. 2020. 5. 12.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우리는 썩어가는 참나무 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 2020. 5. 11.
엘리베이터 / 나희덕 엘리베이터 - 나희덕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 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 …… 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누구일까,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 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 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새*.. 2020. 5. 11.
속리산에서 / 나희덕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 2020. 5. 11.
땅끝 / 나희덕 땅끝 -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 2020. 5. 11.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2020. 5. 10.
귀뚜라미 / 나희덕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화자인 귀뚜라미는 매미 떼의 소리에 묻혀 아직은 자신의 울음이 노래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 2020. 5. 10.
뿌리에게 / 나희덕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영대(베레미아)의 시집'>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 2020. 5. 10.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네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 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배추’를 키우면서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연과.. 2020. 5. 9.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 나태주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 나태주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 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죽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 2020. 5. 9.
풀꽃 1. 2. 3 / 나태주 풀꽃 1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풀꽃 시인’으로 불리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리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이 시는 ‘풀꽃’이라는 보조관념을 이용하여 원관념인 ‘너’의 유사성을 밝혀 그러한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작고 수수하지만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러운 풀꽃을 제재로, 세상 모든 존재가 자기 나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 제목이자 제재인 ‘풀꽃’은 작고 사소해서 사람들이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자세히 보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단 ‘사랑’의 마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토대로 ‘너’.. 2020. 5. 9.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대숲 아래서 -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서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을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2020. 5. 8.
촉 / 나태주 촉 - 나태주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 시집 《하늘의 서쪽》(2000) 수록 ◎시어 풀이 *촉 : ‘싹’의 경상도 방언, 이 시에서는 ‘뾰족하게 내민 싹의 끄트머리’. *각질 : 파충류 이상의 척추동물의 표피 부분을 이루는 경단백질로 이루어진 물질. 이 시에서는 ‘단단한 표면’을 의미한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여리고 부드러운 식물의 싹이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를 비집고 솟아오르는 장면을 통해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명력에 대한 감탄을 노래하고 있다.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생명의 신비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이 시는 시각과 촉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 2020. 5. 8.
사는 일 / 나태주 사는 일 - 나태주​ ​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2020. 5. 8.
별을 굽다 / 김혜순 별을 굽다 -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 2020. 5. 8.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시집 《또 다른 별에서》(198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박수근 그림의 이미지와 화법이 지닌 특성을 시적인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라는 부제를 통해.. 2020. 5. 7.
사월(四月) / 김현승 사월(四月) - 김현승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尖塔)*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 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 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 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水仙)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 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2020. 5. 7.
강우(降雨) / 김춘수 강우(降雨) -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뼘 두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 시집 《거울 속의 천사》(2001) 수록 ◎시어 풀이 *넙치지지미 : 넙치를 밀가루에 묻혀서 기름에 튀긴 음식. *담괴 : 담(痰)이 살가죽 속에 뭉쳐서 생긴 멍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아내의.. 2020. 5. 7.
능금 / 김춘수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능금’이.. 2020. 5. 7.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사진 : 이중섭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 편지> 내가 만난 이중섭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2020. 5. 6.
만월(滿月) / 김초혜 만월(滿月) - 김초혜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 만리가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도 한 마음으로 달은 뜬다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 - 시집 《그리운 집》(199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달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그대와 나 사이에 있어서도/ 한 마음으로 달이 뜬다’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달’은 화자로 하여금 그대를 떠올리리게 해 주는 시적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오늘 밤은/ 잊으며/ 잊혀지며/ 사는 일이/ 달빛에/ 한 생각으로 섞인다.’라고 시상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흔히 통속(通俗)에 머무를 수 있는 사실을 품격 있.. 2020. 5. 6.
어머니 / 김초혜 어머니 - 김초혜 1.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 시집 《어머니》(1988)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어머니와 자식이 본래 한 몸이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어의 적절한 생략을 통해 간결미를 구현하고, 어머니와 자식의 대조적인 모습을 병치하여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어머니와 자식은 ‘한 몸’이었으나 ‘서로 갈려/ 다른 몸이 되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한 몸이었다가 서로 갈려 ‘주.. 2020. 5. 6.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꽃이 피는 과정을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꽃대가 흔들리고 중심에서 벗어나야 꽃이 핀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명에의 추구를 형상화하였다. 화자는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본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인 꽃대는 흔들린다. 꽃이 피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중심에 서 있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심을 지키고.. 2020. 5. 6.
무화과 / 김지하 무화과 -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 2020.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