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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귀뚜라미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0.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화자인 귀뚜라미는 매미 떼의 소리에 묻혀 아직은 자신의 울음이 노래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노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귀뚜라미로 의인화하여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데, 매미와 귀뚜라미의 대비를 통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청각적 이미지와 음성 상징어를 주로 사용하여 시적 상황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인 여름이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는 여름, 지하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들려 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그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일 뿐 노래가 아니다. 여기서 노래란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귀뚜라미의 울음은 아직 노래가 아닌 울음에 불과하다. 귀뚜라미가 우는 차가운 바닥은 매미가 흔드는 높은 가지와 대조된다. 그러나, 숨 막히는 지하 콘크리트 벽에서 귀뚜르르 뚜르르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타전 소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금은 매미가 위세를 떨치는 여름이지만, 매미 울음 그치는 가을이 와서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라며, 소외되어 있던 귀뚜라미는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이 시는 주류가 판치는 상황에서 소외된 이들이 자기 나름대로 소리를 내도 그 빛을 드러낼 수 없지만, 상황이 변화되어 고통스러운 현실을 딛고 일어나 다른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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