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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배추의 마음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9.

 

 

 

배추의 마음

 

- 나희덕

 

네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 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배추를 키우면서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느끼는 생명의 가치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다른 생명을 위해 기꺼이 제 한 몸을 내어주는 배추에 인격을 부여하여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으며, 특히 독백체의 어투로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화자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하는 이 시의 화자는 들판에서 자라나는 배추를 보면서 교감을 나누고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 화자는 1연에서 의인법으로 표현된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에서 배추와의 정서적 교감을 이루고, 자연친화적인 태도로 자라고 있는 배추에게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라고 독백체로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고 있다. 화자는 이 사랑의 말이 그들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삶에 대해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연에서 화자는 배추와 교감을 나누고 있는데, 이를 통해 배추가 보여 주는 희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배추 포기를 묶어 주려 하지만, 배추벌레가 포기 속에 갇힐까 봐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화자는 배추벌레에 반은 먹히고도(희생과 헌신) ‘순결한 잎’(생명의 신비로움)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추벌레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잘 자라서 사람에게 기쁨을 주려는 마음을 의인법과 설의법을 사용하여 독백체로 표현하고 있다. 즉 배추는 화자에게 정신적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라며, 자연과 인간의 교감, 나아가서는 자연과 인간의 동화를 이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배추 풀물은 배추의 순수한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희덕 시인은 이 시 <배추의 마음>을 쓰게 돤 경위를 나중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배추의 마음20대 중반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이라는 수도원에 머물 때의 경험을 담은 시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일정한 노동만 하면 그냥 먹고 잘 수 있었다. 마침 배추밭에 일손이 필요하다기에 냉해를 막기 위해 지푸라기로 배추포기를 묶어 주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살다가 늦가을 수도원의 배추밭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식구 이상으로 친근하고 강한 정신적 유대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추의 마음은 밭 구석에서 묵묵히 일을 하며 들었던 사람들의 대화를 나중에 시로 쓴 것이다. 사람들은 몰랐으리라, 자신들 곁에 한 젊은 시인이 마음으로 그 말들을 받아적고 있었다는 것을. 이 시에 인용문으로 처리되고 있는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등은 실제로 내가 들었던 말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 순하고 평화로운 말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노동을 마치고 저녁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이 시를 쓰면서도 나의 주관적 감상보다는 그들의 온기가 되살아나도록 애를 썼다.” (나희덕 : ‘노래로 듣는 시 3’ 배추의 마음- 배추의 풀물과 사람의 옷소매)

 결국, 이 시는 배추를 키우는 화자가, 배추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과 배추의 마음을 통해 서로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 작품인 것이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작성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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