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아래서
-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서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을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도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빛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빛만이 내 차지다.
- 《서울신문》(1971)
◎시어 풀이
*등피(燈皮) : 램프에 씌워 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게 막고 불을 반사시켜 밝게 하는 유리로 만든 물건.
*후득이다 : 굵은 빗방울 따위가 성기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다.
*사운대다 : 가볍게 이리저리 자꾸 흔들리다.
*자죽 : ‘자국’의 방언(강원).
*동구(洞口) : 동네 어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1971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1973년 동명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으로, 자연 속에서 느끼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가을날 대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젖어 임을 떠올리는 화자인을 향한 그리움과 이을 잃은 상실감으로 슬픔에 젖어 있었지만, 또 자연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짧은 4편이 모여 한 편 시를 이루는 이 시는 각 연에 번호를 부여하여 각 연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화자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4연 이하에서는 ‘내 차지다’라는 시구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운율을 형성하는 동시에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인 ‘나’는 대숲에 이는 ‘바람’으로 상념에 잠긴다. ‘바람’에서 ‘구름’으로, 이어 ‘생각’. ‘대숲’ ‘내 마음’, ‘낙엽’으로 연쇄적 사고에 따라 상념에 젖어 임을 떠올려본다. 2연에서는 ‘그슬린 등피’에 임의 얼굴이 어려, ‘밤 소나기 소리’, ‘밤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지만, 3연에서는 임을 향한 그리운 마음에 편지도 쓰고, 꿈을 꾸기도 하지만, 임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고조되면서 상실감에 눈물이 고일 뿐이다. ‘어제는’, ‘어젯밤’, ‘자고 나니’ 등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밤잠을 설친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임에 대한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은 모두가 내 것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연 속에서 화자는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저녁 구름’, ‘애들의 소리’, ‘밤 안개’. ‘달님’들은 화자를 위로해 주는 대상물들로서, 화자는 그것만이 ‘내 차지다’라는 시구로 슬픔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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