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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 나태주

by 혜강(惠江) 2020. 5. 9.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 나태주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 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죽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 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 트고 있다, 다시 눈 트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 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고 있다.  

 

             - 시집 대숲 아래서(1973) 수록


 

시어 풀이

*뒤울안 : 울타리로 둘러 쌓여 있는 뒤뜰

*비칠비칠 : 눈물 찌꺼기가 남아 어리는 모양

*날무 : 생무. 무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썰어놓은 논무

*끄들끄들 : ‘건들건들혹은 쪼글쪼글의 방언

*개다리소반 : 상다리의 모양이 개의 다리처럼 휜 막치 소반.

*상사발(常沙鉢) : 품질이 낮은 사발. 막사발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대숲소리를 들으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고된 삶 속에서 잊고 살았던,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는 대숲바람 소리를 통해 떠올린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장면처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고, 고대 소설인 심청전을 차용하여 화자의 어린 시절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드러내는 한편 어구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운율감을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대숲바람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화자는 등 너머로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람 소리 속에 초록별의/ 퍼렇게 멍든 날개죽지가 떨어져있다고 느낀다. ‘초록별은 푸른 댓잎의 은유이며, 동시에 어린 시절의 화자를 비유한 대상이기도 하다. 날개죽지가 떨어진 표현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지꺼기와 연결되면서 어린 시절 힘겨웠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이어진다. .

 

 이어 2연에서 화자는 가난했던 자시의 처지와 유사한 고전 소설 속 심청이를 통해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햇살을 통해 유년 시절의 희망과 아름다움 또한 떠올리고 있다. 이렇듯, 화자에게 유년 시절은 아픔과 상처로 점철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과 희망이 있었음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햇살다시 눈 트고 있다를 반복하여 잊고 있었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에서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는 심청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을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며, ‘다시 무너져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는 심청이의 모습에서 발견한 희망을 현재의 가 떠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3연은 희망을 지니고 살았던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4연 서두에서는 1연에서의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거듭되는데, 이것은 결국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 시절 가난 속에서도 품었던 마음 부자의 여유를 지금은 잃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놓쳐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반쪽이 손짓하지만, 가닿을 수 없다는 데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저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지만,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데서 한없이 그리움만 쌓일 뿐이다. 가난의 아픈 상처가 있더라도 마음 부자로 살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듣는 대숲바람소리는 바로 그리움의 소리인 것이다.

 

 

작자 나태주(羅泰柱, 1945 ~ )

 

 시인. 충남 서천 출생. 1971서울신문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과 사색, 천진하고 참신한 착상,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 등을 노래하였다. 대표적인 시로는 '풀꽃'이 있다.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1973), 막동리 소묘(1980),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1985), 빈손의 노래(1988),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1987), 눈물난다(1991), 하늘의 서쪽(2000), 산촌엽서(2002),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2005), 물고기와 만나다(2006), 꽃이 되어 새가 되어(2007), 눈부신 속살(2008), 너도 그렇다(2013), 꽃을 보듯 너를 본다(2015), 기죽지 말고 살아 봐(2017),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2017),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2018) 등이 있다. 그리고, 산문집으로 대숲에 어리는 별빛(198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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