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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뿌리에게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0.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이영대(베레미아)의 시집'>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 출전 중앙일보(1989)



시어 풀이

*갈구어진 : 잘 일궈진

*먼우물 : 먼물. 먹을 수 있는 우물물.
*하냥 : ‘의 방언
*두릅 : 나무의 새순. 여기서는 두름의 의미(생선 20마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모성적 생명 의식을 뿌리의 관계를 통해 그려 낸 시이다. 회상적 어조를 통해 화자와 대상과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의 헌신적인 사랑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모성적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시는 의인화의 수법을 빌려 화자를 ''으로, 청자를 '뿌리'로 비유하고 있다.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설정하여,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이 거칠어지는 자연 현상을 통해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모성애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뿌리의 대비를 통해 의 희생적 사랑을 부각하는 이 시는 화자인 이 청자인 뿌리에게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뿌리의 성장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흙은 뿌리가 '푸른 줄기'로 솟아나도록 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뿌리에게 아낌없이 준다. 사랑의 대상을 향해 자신을 끊임없이 비움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일구어 내는 흙은 어머니의 이미지와 통한다. 1연에서 잘 일궈진 기름진 맑은 피 뽑아’ ‘뿌리에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떤다. 여기서 맑은 피는 물을 비유한 것으로, 2연으로 이어지면서 나를 뚫고’, ‘네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뻗어가라고 한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뿌리가 자라가기를 노래하고 있다. 3연에서 흙은 뿌리를 감싸는 착한 그릇이 되어, 모진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뿌리가 뻗어가는 것을 축복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갖겠다고 한다. 여기서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은 희생의 기쁨을 강조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하면서 누리는 어머니의 기쁨과 다를 것이 없다.

 

 한걸음 나아가 4연은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주는 뿌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은 모든 것을 다 내주고 난 초라한 모습이며, 마지막 희생,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5연은 이토록 진한 사랑과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 희생의 값으로 푸른 줄기 솟아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는 날,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것을 확신한다. ‘빈 그릇처럼 보이는 희생의 끝에 연한 흙으로 다시 채워지는, 새롭게 재생되는 순환의 원리인 것이다. 이 시는 흙이 '착한 그릇 껍데기 빈 그릇'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한 흙'이 된다고 하여, 또 다른 생명을 탄생, 성장시키는 순환 과정의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나희덕 시인은 모든 생명을 포용하고 길러내는 여성(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부각하여 새로운 여성주의 시를 개척하였다. 나희덕의 모성적 상상력은 사물을 대립과 갈등 대신에 조화와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나희덕 시인이 노래하는 헌신적인 사랑은 타인을 부정하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몰두하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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