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화자인 귀뚜라미는 매미 떼의 소리에 묻혀 아직은 자신의 울음이 노래가 아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노래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귀뚜라미로 의인화하여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데, 매미와 귀뚜라미의 대비를 통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청각적 이미지와 음성 상징어를 주로 사용하여 시적 상황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인 여름이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는 여름, 지하 콘크리트 좁은 틈에서 들려 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그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일 뿐 ‘노래’가 아니다. 여기서 ‘노래’란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아직 노래가 아닌 울음에 불과하다. 귀뚜라미가 우는 ‘차가운 바닥’은 매미가 흔드는 ‘높은 가지’와 대조된다. 그러나, 숨 막히는 지하 콘크리트 벽에서 ‘귀뚜르르 뚜르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타전 소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금은 매미가 위세를 떨치는 여름이지만, 매미 울음 그치는 가을이 와서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라며, 소외되어 있던 귀뚜라미는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이 시는 주류가 판치는 상황에서 소외된 이들이 자기 나름대로 소리를 내도 그 빛을 드러낼 수 없지만, 상황이 변화되어 고통스러운 현실을 딛고 일어나 다른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년 ~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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