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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별을 굽다 / 김혜순

by 혜강(惠江) 2020. 5. 8.

 

 

 

 

 

별을 굽다

 

 

- 김혜순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심장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 시집 당신의 첫(2008) 수록

 

 

시어 풀이

 

*가면 : 얼굴을 감추거나 달리 꾸미기 위하여 얼굴에 쓰는 물건.
*불가마 : 불을 때서 벌겋게 단 가마. 가마는 숯이나 질그릇, 기와, 벽돌 따위를 구워내는, 아궁이와 굴뚝이 있는 시설을 의미함.
*밀물지다 :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들어오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지하철 환승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고단한 일상과 그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으려는 소시민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지하철 환승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며 화자는 현대인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의 힘을 발견하고, 삶에 대한 꿈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지하철 환승역이라는 공간을 통해 현대의 도시적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현대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흙 가면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설의적 표현을 통해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화자는 지하철 환승역에서 만난 수많은 얼굴이 모두 붉은 흙 가면과 같다며,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을 구워냈을까?’ 하는 생의 근원에 의문을 품는다. 화자가 불가마들이 구워낸 그들을 붉은 흙 가마에 비유한 것은 그들의 무표정한 듯 보이는 얼굴에서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불가마는 그냥 가마가 아니라 불로 달구어진 가마로 항상 뜨거운 열기를 간직한 가마이다. 그 불가마로 진흙을 구워 일상을 살아갈 가면을 만든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어 화자는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밀물져 가게 하는 힘인 열정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하늘의 조물주가 이들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지만,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는 분인 조물주가 계시겠지만, 하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땅속 지하철에는 그런 힘이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서 은 내면에 뜨거움을 간직한 존재, 스스로 빛을 내는 인간을 가리킨다. 결국, 화자는 4연에서 각각의 사람들 몸속에 불가마가 하나씩 깃들어 있그 뜨거운 심장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라며, 그것이 평생 사람들의 생()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의 화자는 신()이 인간을 구워내거나, 또는 인간을 구워내는 불가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속의 평생 꺼지지 않는 불길 같은 심장을 통해 삶을 구워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 인간이야말로 능동적이고 힘차게,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처럼 빛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안간은 그 불가마로 진흙을 구워 일상을 살아갈 가면을 만들고, 스스로 빛을 내는 을 굽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평생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작자 김혜순(金慧順, 1955 ~ )

 

 

 시인. 경북 울진 출생. 1979문학과 지성<담배를 피우는 시인>, <도솔가>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기발한 상상력과 풍부한 언어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부조리와 일상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어느 별의 지옥(1988), 우리들의 음화(陰畵)(1990),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 불쌍한 사랑 기계(1997),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 당신의 첫(200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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