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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by 혜강(惠江) 2020. 5. 7.

 

 

 

<박수근 화백의 작품 '세 여인'>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 시집 또 다른 별에서(198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박수근 그림의 이미지와 화법이 지닌 특성을 시적인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세상을 표현하는 박수근 특유의 색채와 질감을 언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대부분 시골 아낙네, 노인, 어린이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박수근은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극도로 단순 명료한 형태를 추구했다.

 

 1연에서 화자는 박수근의 그림처럼 입체적인 이 세상을 납작하게 눌러서 벽에 걸어놓겠다고 말한다.  박수근은 나무와 여인’ ‘세 여인’ ‘아기 보는 소녀’ ‘母子’ ‘시장의 여인과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그림의 소재를 일상과 이웃의 평범한 삶에서 얻었다. 그 속에는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여편네와 아이들과 같은 세상이 담겨 있다.  여기서 납작하게는 박수근 화법의 특징인 동시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달프게 사는 서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화자는 이를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그렇게 납작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납작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정서는 서글픔과 애처로움일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아무런 표정 없이 서성거리며 살다가 드디어는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말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박수근 화가의 작품 기법이며, 동시에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바짝 마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사람을 억누르고 납작하게 만든다는 뜻일 것이다.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은 박수근 화법의 특징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풍경이 같은 평면에 놓여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균질화 현상은 슬그머니구체성을 지운 채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은형국이 된다. 화자가 하나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러한 바짝 마른 삶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설 의적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화자는 박수근 화가의 미술 작품의 표현 기법을 시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서민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 김혜순(金慧順, 1955 ~ )  

   

 시인. 경북 울진 출생. 1979문학과 지성<담배를 피우는 시인>, <도솔가>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기발한 상상력과 풍부한 언어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부조리와 일상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어느 별의 지옥(1988), 우리들의 음화(陰畵)(1990),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 불쌍한 사랑 기계(1997),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 당신의 첫(200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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