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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능금 / 김춘수

by 혜강(惠江) 2020. 5. 7.

 

 

 

 

 

능금

 

 

-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素描)(1959)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능금이 익어 가는 과정을 통해 무한한 그리움의 성숙과 자연의 교감(交感)에 의한 충만함, 곧 존재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가을 햇살과의 교감으로 충실히 익어가는 '능금'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고, '능금'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밝히게 된다. 이와 같은 결실과 성숙의 신비를 화자는 '그리움', '축제', '애무의 눈짓', '세월', '감정의 바다'와 같이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하여 딱딱한 지적 내용을 풍요로운 서정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정서의 표출과 지성의 절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1연에서 '능금''그리움'을 통해 성숙하여 아름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되며, 결국 스스로의 '무게'로 인해 떨어진다. 이때의 '그리움''능금'의 본질로서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힘이라 볼 수 있다. , ‘그리움'능금의 본질'을 비유한 표현으로, 작가는 '그리움'이라는 정감을 시각적 이미지인 '빛깔'과 후각적 이미지인 '향기'로 바꾸어 드러내고 있다.

 

 2연에서는 '가을'의 사랑에 찬 교감으로 충실히 익어 가며 ''와 합일된 '능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 '이미 가 버린 그 날(과거)''아직 오지 않은 그 날(미래)' 사이인 '이 아쉬운 자리(현재)'에서 충실히 내적 성숙을 추구하는 '능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능금을 비추는 따스한 가을 햇살이 능금을 무척 사랑하는 듯, 능금의 내적 성숙(충실)을 돕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3연에서는 이렇게 충실히 익어 가는 '능금'이 구체적 자연물이 아닌 추상적 관념임을 밝히고 있다. , 화자는 '능금'을 따라가다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를 발견하는데, 이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시인은 '능금'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그리움과 충만함이 이루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그려 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능금'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의 본질이자 존재의 본질을 엿본 화자의 감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화자는 이러한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에 신비로워한다. 이처럼 이 시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화자의 깨달음을 간결하게 진술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능금의 이미지는 '그리움'에서 '아름다움과 충실함'으로, 여기서 다시 '경이감과 감동',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이어지면서, 구체적 사물을 통해 추상적 의미를 형상화하였으며, 대상에 대한 경이감을 차분한 어조로 노래함으로서 현대시의 새로운 경향을 이끈 현상적 세계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자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 경남 통영 출생.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서 인식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는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던 시인이자 시 이론가였다. 그가 제시한 무의미시는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시문학사에 깊게 각인돼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지로 승화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 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구름과 장미>, <>, <>, <>, <꽃을 위한 서시>. <꽃의 소묘>, <타령조·기타>, <남천>, <처용단장>, <들림>, <쉰 편의 비가>, <달개비꽃> 외 다수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1948), 인인(隣人)(1953),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남천(南天)(1977), 처용단장(1991),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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