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 시집 《애린》(1986) 수록
*무화과 : 뽕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2~3m, 열매는 어두운 자주색.
*개굴창 : ‘개골창’의 강원도 방언. 수채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도둑괭이 : 도둑고양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무화과’의 생태에서 인간의 내적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시로, 암울한 현실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한탄과 그에 대한 위로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비록 화려하거나 남들의 눈에 띄게 요란하진 않아도 '열매' 속에서 '속 꽃'을 피우며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아름답게 여기는 시인의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1969년 《시인》에 <황톳길>, <비>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대학 다닐 때 4·19혁명, 6·3사태 등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 1970년 담시 〈오적(五賊)〉 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자신의 울분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최근에는 생명 사상에 입각한 생명에 대한 외경과 달관의 자세로 구도자적 정서를 주제로 노래한다. 대표작으로 <화개>, <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가 있다. 시집으로 《황토》(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오적(五賊)》(1985), 《남녘땅 뱃노래》(1987), 《애린 1·2》(1987), 《이 가문 날의 비구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비단길》(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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