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1.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우리는 썩어가는 참나무 떼,
벌목*의 슬픔으로 서 있는 이 땅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함께 썩어갈수록
바람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흔들고
이윽고 잠자던 홀씨들 일어나
우리 몸에 뚫렸던 상처마다 버섯이 피어난다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
우리는 서서히 썩어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후드득 피어나
그 고통을 순간에 멈추게 하는구나

, 버섯이여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으로도
골짜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길 없는 우리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우는구나   

        

             - 시집 뿌리에게(1991)

 

 

시어 풀이

*벌목(伐木) : 나무를 벰. 간목(刊木).

*패역(悖逆) :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順理)를 거스름.

*독기(毒氣) : 독이 있는 기운. 사납고 모진 기운.

 


이해와 감강


 이 시는 벌목 당한 참나무 떼를 화자로 내세워 피어나는 버섯을 통해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소외된 존재를 모성 본능으로 감싸려는 의지로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노해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썩어가는 참나무떼이다. ‘참나무 떼인 우리는 패역의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겨울을 난다.’ 여기서 패역의 골짜기는 참나무 떼들이 벌목 당한 채 썩고 있는 음지(陰地)이며, ‘참나무 떼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에서 서로 기댄 채 고통의 시간을 지난다. 제 각각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진술한다. 함께의 의미가 이어지는 진술을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함께썩고 있는 참나무 떼에서 바람에 날려온 홀씨들이 참나무 떼의 몸에 뚫린 상처에서 버섯이 피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화자는 그 버섯을 음지의 꽃으로 명명한다. ‘상처으로 승화시키는 버섯의 생명력에 화자는 감탄하고 있다. 여기서 홀씨는 버섯이 피어나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며, ‘황홀한 음지의 꽃이여라는 표현은 버섯의 놀라운 생명력을 역설적인 표현하는 반전 드라마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 표현 속에는 버섯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화자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썩어가지만/ 너는 소나기처럼 흐드득 피어나라고 표현함으로써 벌목 당해 서서히 썩어 죽어가고 있는 참나무 떼에게서 피어나는 버섯을 후드득이라는 의태어를 사용하여 생명력의 발현을 예찬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곧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버섯의 생명력은 산비탈에 구르는 낙엽이나 골자기를 떠도는 바람으로도 덮을 수 없는 참나무 떼의 몸을 뿌리 없는 너의 독기로 채운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참나무에서 피어난 뿌리 없는 버섯의 끈질긴 생명력을 독기’(毒氣)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자신을 뒤덮으며 피어난 버섯의 놀라운 생명력으로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을 느끼는 참나무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나희덕의 시는 상처투성이의 연약하고 소외된 존재들을 모성적 본능으로 감싸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소외된 존재들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작성자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 밤 / 나희덕  (0) 2020.05.13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0) 2020.05.12
엘리베이터 / 나희덕  (0) 2020.05.11
속리산에서 / 나희덕  (0) 2020.05.11
땅끝 / 나희덕  (0) 2020.05.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