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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엘리베이터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1.

 

 

 

 

 

 

엘리베이터  

  

 

 

- 나희덕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 버렸다

11, 9, 7, 5…… 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누구일까,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 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 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새*

홀수 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시 사람들이 채워진다.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 아우성이 채워지고, 문이 닫히고,

빽빽해진 모판은 비워지기 위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1, 3, 5, 7, 9, 11……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입으로 들어갈 밥과 국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밥과 국을 삼키지 못하는 육체를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손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시집 <사라진 손바닥>(2004) 수록

 

 

시어 풀이

 

*모판 : 못자리 사이사이를 떼어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놓은 구역.

*칠성판 : () 속 바닥에 까는 얇은 널조각

*그새 : ‘그사이의 준말.

 

 

이해와 감상

 

 

 이 시  엘리베이터2004년에 출간된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병원이다. 병원의 엘리베이터는 끊임없이 비웠다가 채워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넘나든다. ‘엘리베이터에는 삶과 죽음은 서로 멀지 않다는 것, 사람들은 끝없이 채우며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음 뒤에 공허함은 숙명적인 것이라는 화자의 인식이 반영되고 있다.

 

 시인은 병원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경험한 생()과 사()의 연속성, 즉 삶과 죽음이 어떤 지점에서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엘리베이터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인간의 삶이란 죽음에 가까이 맞닿아 있으며, 삶이란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몸이 아파서, 가족 중에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해서, 가까운 사람이 병문안을 위해서 병원을 방문했을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만원 엘리베이터에 육중한 몸집을 소유한 한 아주머니가 불평을 하며 탑승한다. 급기야 그 아주머니가 타자 만원 엘리베이터는 빽빽한 모판처럼 비좁게 되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그 모판은 고층에서 저층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헐거운 모판으로 변해간다.

 

 그때 불현듯 짝수층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병원에서 듣는 울음은 대개가 죽음을 뜻하는 소리이다. 하여 화자는 병원의 엘리베이터가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 층 엘리베이터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 층 엘리베이터로 나뉘어 있으나 결국 죽음의 엘리베이터와 의 엘리베이터, 짝수 층 엘리베이터와 홀수 층 엘리베이터는 운명적으로 1층에서 만난다. 1층에서는 짝수 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홀수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물끄러미 라본다. 하지만 1층은 사자(死者)의 공간이 아니다. 이윽고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이/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남아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죽음의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는 그 순간에 의 엘리베이터는 새로운 사람들을 가득 싣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 채비를 한다.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끝없이 교차하는 곳이며, 우리는 그곳을 세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병원과 엘리베이터의 구조에서 시인은 삶의 두 얼굴, 즉 생()과 사()가 교차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내려가면 또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가 태어나면 또 누군가는 죽는 것,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인 것을. 이러한 경험에서 엘리베이터는 삶과 죽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양쪽 모두에 속한다.

 

 시인은 엘리베이터의 이런 속성을 2연에서 나른다라는 동사로 표시한다. 엘리베이터는 병든 신체를 위한 을 나르기도 하지만, ‘을 먹지 못하는, 더 이상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죽음을 나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는 병든 손을 붙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나르기도 한다. 시인에게 병원은 생()과 사()가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계의 축도와 같은 곳인 듯하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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