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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속리산에서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1.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길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은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수록

 

시어 풀이

*선망(羨望) : 부러워하여 바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속리산을 오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삶을 성찰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떠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이며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화자에게 준다.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최고봉인 천왕봉의 높이는 1,058m로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이 산 동쪽은 낙동강 유역, 남쪽은 금강 유역, 북쪽은 한강 유역이다.

 

 나희덕의 시 <속리산에서>는 속리산 등산을 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대상을 의인화하여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고, 마지막 행에서는 대상인 속리산을 객체에서 주체로 바꾸어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보였다고 한다. 성취욕을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던 시인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과 대비되는 삶을 살아온 자신을 성찰하게 해 준다. 그래서 시인은,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임을 산으로부터 듣는다. 그럼에도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시인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시인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속삭이며, ‘산을 오르고 있지만시인이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그것만이 아니다. 지금 산을 오르는 고단함보다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즉 우리들의 실제 일상적인 삶이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일러주는 것이다. 이것은 높이 오르는 것만이 성공이라는 세속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인에게 높이 오르는 것보다 오히려 경쟁의식 속에 살아가는 산 아래 속세의 삶이 더 고달프지 않았겠느냐는 산의 가르침이다.


 이를 통해 시인은 속리산이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속리산을 주체화해서 표현한 이 말 속에는 길게 길게 늘여서여유를 가진 삶을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속리산을 오르며, 산다는 것은 높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임을 속리산을 통해 깨닫고 있다. 인생을 산행에 비유한다면, 이 시에서 시인이 가르쳐주는 것은 정상에만 오르는 것보다는 법주사 경내를 걷다가 계곡을 지나고, 산등성이를 넘고. 그리고 둘레길까지 걸으며 점점 더 깊이 산속으로 들어가 산의 품에 안기는 것이 진정한 산행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높이(경쟁)에 대한 열망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작성자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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