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다음카페 '문학광장'>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수록
◎시어 풀이
*응시(凝視) :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뚫어지게 봄.
*에움길 : 굽은 길. 에워서 돌아가는 길.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하는 대상인 '너'를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사랑을 찾아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밤, 화자는 고백의 형식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별, 꽃들, 두레박 등은 대상에 대한 화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어로 대상에 대한 사랑의 정서를 강조하는 것들이다.
1연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지만, 그 무수한 길은 결국 네게로 향한 것이었음을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2연에서는 ‘너’와 헤어져 외로울 때에도 ‘내 응시에 알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곧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3연에서 나는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이라는 표현으로, ‘너’를 사랑하면서 수없이 감정의 변화를 겪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레박’은 사랑을 퍼 나는 화자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너'를 향한 화자의 사랑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뼈 아픔의 연속인 것이다.
그러나, 4연에서 ‘너’와의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 하는 길은 ‘수만 갈래의 길’이고, ‘은하수의 한 별’인 내가 ‘또 하나의 별’인 ‘너’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한 길이기도 한 것인데, 5연에 와서 ‘나으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고 자신이 걷고 있는 모든 길이 결국은 ‘너’를 향한 것이었다고 다시금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에움길’은 ‘에워서 돌아가는 길’이란 뜻으로, 사랑의 열정은 쉽고 순탄한 ‘지름길’보다는 여러 과정을 거치며 고비를 겪고 나서 얻게 될 때, 그 진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은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담아낸 시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형상화함으로써, 이 시를 읽는 이들은 마음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며, 심미적·정서적 가치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년 ~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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