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3.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의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는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더미 앞에 마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어느 날, 저녁에 자신에게 닥친 온갖 고통을 피하기만 했던 이전의 삶을 성찰하면서 고통을 담담히 수용하려는 삶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어둠과 당당히 맞서려는 의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시의 표현의 특징은 바라보려 한다’, ‘들으려 한다’, ‘있으려 한다등의 동일한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운율을 높이는 동시에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며, 나열형 연결어미 ‘ ~를 반복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시각, 청각, 공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대상을 표현하고 있다.

 

 1연은 시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연으로, 화자는 저물 무렵/ 개천의 물무늬와 미물인 하루살이 떼를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관찰을 통해 자연을 바라본 것들이지만 무심히 어른거리는’, ‘한구석에 뒤엉킨’, ‘마지막 혼돈등의 표현으로 볼 때 의미 없이, 어지럽게,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화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감히라는 시어의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무관심했던 무의한 삶에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성찰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2연에서는 눈으로 지각하는 시각적 대상에서 귀로 듣는 청각적인 대상으로 옮겨간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를 감히 들으려 한다. 모두 청각적인 이미지이지만,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는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도 감히라는 시어가 자연을 경청하는 것에서 내면의 성찰로 이어지게 됨을 드러내 준다.

 

  3연에 오면, 1연과 2연에서 보여준 성찰의 자세로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 둥글게 새겨 넣으며/ 서 있으려 한다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나이테는 성숙해진 삶을 지칭하는 것으로, 성숙을 위해 어둠으로 표현된 온갖 고통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에서 옹이는 어둠의 수용과 인고를 통해 더욱더 단단해진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어둠의 수용과 인고를 통해 더욱 삶이 단단해질 때까지 서 있으려 한다라는 모습에서 어둠과 당당히 맞서려는 화자의 의지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고통에 맞서 단단해질 때까지는 고통스러운 삶(잡초더미) 앞에 늘 서 있어야 하는 그런 저녁이다. 그러나 화자는 고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냥 서 있고 싶은에서 보듯, 지속적인 성찰에 대한 소망의 자세를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0) 2020.05.14
못 위의 잠 / 나희덕  (0) 2020.05.14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0) 2020.05.13
푸른 밤 / 나희덕  (0) 2020.05.13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0) 2020.05.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