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소한*이 가까워지자 눈이 내리고 날이 추워져
그대 말대로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은 더욱 빛난다
나도 그대처럼 꺾인 나무보다 꼿꼿한
어린 나무에 더 유정한* 마음을 품어
가지를 매만지며 눈을 털어 낸다
이미 많은 새들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지 오래인데
잔가지로 성글게* 엮은 집에서 내려오는 텃새들은
눈 속에서 어떻게 찬 밤을 지샜을까
떠나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깨어
어깨를 털고 서 있는 버즘나무 백양나무
열매를 많이 달고 서 있던 까닭에
허리에 무수히 돌을 맞은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잣나무에 가려 똑같이 푸른 빛을 잃지 않았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측백나무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발 아래 밟히며 부서지는 눈과 얼음처럼
그동안 우리가 쌓은 것들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 소리
언제쯤 그칠 것인지 아직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기나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던 길
그대 오만한 손으로 떼어냈던
편액*의 글씨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듯
나도 이 버림받은 세월이 끝나게 되면
내 손으로 떼어냈던 것들을 다시 걸리라
한 계단 내려서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보리라
이 싸늘한 세월 천지를 덮은 눈 속에서
녹다가 얼어붙어 빙판이 되어버린 숲길에서
- 시집 : 《마음의 쉼표》(2010) 수록
◎시어 풀이
*소한(小寒) : 24절기의 스물셋째(동지와 대한 사이로, 양력 1월 6일경. 이 무렵부터 겨울 추위가 시작된다고 함)
*유정한 : 인정이나 동정심이 있는.
*성글게 : 물건의 사이가 뜨게.
*비음(鼻音) : ① 코가 막힌 듯이 내는 소리. ② 코 안을 울리면서 내는 소리 (ㄴ·ㅁ·ㅇ의 소리). 콧소리
*편액(扁額) : 종이·비단 또는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보고 감동을 받은 작가가 김정희와 같이 시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를 김정희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우선,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대한 답례로 그린 그림이다. 잎이 다 떨어져 겨우 목숨을 이어 가는 듯한 소나무와 잣나무의 모습은 시련에 굴하지 않는 고결하고 꿋꿋한 기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시인은 ‘세한도’의 발문에 실려 있는 공자의 말인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라는 문구와 세한도에 얽힌 일화를 떠올리며 겨울을 견디는 여러 자연물에게서 느낀 연민과 아름다움, 시련을 견뎌 낸 이후의 삶에 대한 각오를 시로 표현해 낸 것이다.
화자인 ‘나’는 고난의 현실에서 김정희의 <세한도>와 추사에 얽힌 일화를 떠올리며 김정희를 ‘그대’로 설정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살 것을 다짐하고 있다. 자연물에 대한 화자의 긍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색채의 대비를 통하여 선명한 인상을 드러내 준다.
화자는 날이 추워지자, 추사의 <세한도>의 발문의 ‘아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이 더욱 빛난다’며, 어린 가지에게 마음을 기울이다. 이어 시련을 견디는 많은 새들과 여러 나무들을 열거하면서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에게 연민과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대륙을 건너와 눈을 몰아다 뿌리는/ 냉혹한 비음의 바람 소리’ 를 들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이 없는 추위(시련)를 걱정한다.
그러나, 18행에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추사가 유배 생활이라는 시련을 견디고 겸허해진 것처럼 자신도 ‘버림받은 세월’(시련을 겪은 세월)을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한 계단 내려서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더욱 겸허해지겠다는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렇듯 이 작품은 ‘세한도’가 품고 있는 기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더하고, 작가가 추구하는 고결한 정신적 가치를 곧고 결백한 느낌의 시어와 소재들을 사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작자 도종환(都鐘煥, 1954~ )
시인.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며, 감성의 시인으로 이별과 사랑을 소재로 한 서정성이 풍부한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1985),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 《마음의 쉼표》(2010)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모과》(2000),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등이 있다. 2012년 정계에 입문하여 제19·20·21대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 해설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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