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by 혜강(惠江) 2020. 5. 13.

 

 

 

 

 

 

어떤 출토(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 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 하려고 밭에 다시 가 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  

 

                    - 사라진 손바닥(2004) 수록

 

 

시어 풀이

 

*출토(出土) : 유물 등이 땅속에서 나옴. 또는 그것을 파냄.

*소신공양(燒身供養) : 자기 몸을 불살라 부처 앞에 바침. 또는 그런 일.

*은밀한 : 숨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리(舍利·奢利) : 부처나 성자의 유골(후세에는 화장한 뒤에 나오는 구슬 모양의 것을 일컬음), 사리골(舍利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희생적인 삶을 늙은 호박에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즉 화자인 는 고추밭에서 발견한 늙은 호박을 출토한 사물로 제시하고, 호박의 모습을 통해 다른 생명체를 위한 희생이라는 삶의 깨달음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 화자는 수확이 끝난 가을, 고추밭 한쪽 그늘에서 흙 속에 처박힌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한다. ‘뜻밖의 수확이니 화자에게는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출토인 셈이다.

 

 늙은 호박을 들어 올리자 흙 속에 묻혔던 아랫부분이 썩어 온갖 벌레들이 성찬(盛饌)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 ‘달디단 그녀의 젖은 호박의 몸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호박을 모성애를 지닌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 모습이 화자에게는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처럼 보인다. ‘소신공양이란 불교에서 자기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바치는 의식으로 여러 공양 중에 자기 몸을 바치는 공양을 제일 값진 것으로 여긴다. 화자는 온갖 벌레들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벌레를 키우는 호박의 모습을 소신공양으로 표현하여 희생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높이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 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에서, 벌레들이 늙은 호박을 먹고 있는 모습을 은밀한 의식으로 표현한 것은 호박의 희생적 자세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늙은 호박을 단순히 뜻밖의 수확으로 파악했던 물질적인 인식이 은밀한 의식으로 표현함으로써 희생정신을 지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준 화자의 행위는 호박을 의미 있는 존재로 여기는 화자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 후 가을갈이하려고 나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호박은 벌레들에게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주고 마치 종잇장처럼 호박껍질만 남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마지막 행의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이란 벌레들이 몸을 다 먹어버리고  딱딱해 먹지 못해 남은 씨앗사리에 비유함으로써, 화자는 늙은 호박이 소신공양하여 남긴 사리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호박의 희생적 행위를 앞의 소신공양과 함께 종교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 늙은 호박이 남긴 호박씨는 또 다른 생명체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경건성까지 획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추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늙은 호박이 썩어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하며 위와 같이 감동적인 스토리를 엮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인이란 남이 무심코 넘기는 사소한 자연 현상에서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예술의 장인들이다.

 

 

작자 나희덕(羅喜德, 1966~ )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2004),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 그녀에게(2015), 파일명 서정시(2018)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문학관련 > - 읽고 싶은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 위의 잠 / 나희덕  (0) 2020.05.14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0) 2020.05.13
푸른 밤 / 나희덕  (0) 2020.05.13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0) 2020.05.12
음지(陰地)의 꽃 / 나희덕  (0) 2020.05.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