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블로그 ‘玄山書齋’>
여승(女僧)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 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시집 《꿈 꾸는 섬》(1983) 수록
◎시어 풀이
*고뿔 : 감기(感氣).
*장지문 : 지게문에 장지 짝을 덧들인 문.
*토방(土房) : 마루를 놓을 수 있는 처마 밑의, 좀 높이 편평하게 다진 흙바닥.
*포름한 : 산뜻하게 파르스름한.
*애지고 : 마음이 초조해지고
*바리때 : 승려가 쓰는, 나무로 대접같이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 그릇. 바리.
*소승(小僧) : 승려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적선(積善) : 착한 일을 많이 함.
*흐들이 : 흐드러지게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과거에 여승을 본 것을 바탕으로, 그 여승의 깨끗하고 정갈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시를 쓰는 시인의 자세를 드러낸 작품이다.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제한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화자의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서사적으로 시를 전개하여 한 편의 이야기 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화자는 어린 시절, 어느 해 봄날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감기를 앓다가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본다. 그런데 화자가 처음 본 여승의 모습은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과 같다고 하여 여승의 모습이 꼭 짚어 표현할 수 없는, 조금은 신비롭기도 하고 애틋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승에게서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가 났다고 한다. 이것은 어린 시절 만났던 여승을 통해 화자가 처음으로 느낀 여승의 아름다움을 공감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낮달’이라는 시각적 심상을 ‘향내’라는 후각적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그 여승의 모습과 마음에 새겨진 여승의 미적 이미지에 황홀함을 느낀 나머지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동네 동구 밖까지’ 여승을 따라나선다. 여승은 네거리 갈림길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는 듯 웃는 듯’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뒤돌아보고, 한 마디 말을 던진다. ‘도련님, 소승(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대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라고. 이 말 속에는 화자의 행위를 자신을 배웅해 준 적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도한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며 화자를 조용히 달래고 책망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화자는 당황하여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돌아선다. ‘열에 흐들이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있음을 알았다’는 표현은 화자의 흥분되고 긴장한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그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승을 처음 만났던 경험 이후에, 화자는 꿈속에서 여승을 만나곤 했는데, 그 여승은 탈속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은 여승이 세속을 떠난 고결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은 탈속적인 여승의 순수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화자는 예전에 여승을 본 것을 다시금 떠올리며,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이것이 지금의 화자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임을 밝히고 있다.
▲송수권(宋秀權, 1940 ~ )
시인,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남도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한민족의 한과 부정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3), 《아도(啞陶)》(1985),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 《벌거숭이》(1987),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등이 있으며, 장편서사시 <동학란>(1975)이 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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