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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by 혜강(惠江) 2020. 6. 21.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 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숨소리

                 - 시집 《아도(啞陶)》(1985) 수록

 

◎시어 풀이

*대패랭이 :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 ‘패랭이’는 예전에 대오리로 얽어 만든 갓의 하나를 이르던 말. 역졸, 천민, 상인(喪人) 등이 썼다.

*후득이다 : 후두둑거리다.

*황토현 : 동학 농민 운동의 격전지(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1894년 4월 7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질펀히 : ① 땅이 넓고 평평하게 ② 주저앉아 하는 일 없이 늘어져 ③ 질거나 젖어 있어.

*끄으름내 : 그을음 냄새. ‘끄으름’은 ‘그을음’의 전라도 방언.

*개터럭 : ‘솜털’의 전라도 방언.

*숭년 : ‘흉년’의 방언

*얼개빗 : ‘얼레빗’의 방언 (전북). ‘얼레빗’은 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

*장타령 : 속된 잡가의 한 가지.(동냥하는 사람이 장거리로 돌아다니며 부름)

*문발 : 문에 치는 발

*청청한 싱싱하게 푸른.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연 현상의 하나인 대숲 바람 소리가 민중의 숨결로 바뀌면서 그 속에 감춰진 서민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화자는 남도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민족과 민중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 역사의식을 담고 있다. ‘대숲 바람 소리’는 자연 현상의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이 시에서 ‘대숲 바람 소리’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적 삶의 현장으로 우리의 감각기관을 이끌어 가는 전령사의 역할을 한다. 고단하고 힘든 삶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온 민중의 정신과 연결시켜 민중의 삶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5연으로 된 이 시는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변조, 남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향토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1~2연에서 화자는 대숲 바람 소리 속에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과 ‘대 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의 한숨, 삿갓 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가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과 한(恨)이 담겨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3연에서는 ‘대숲 바람 소리’에 1894년 동학군의 징소리 괭과리 소리를, 4연에서는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 ‘개터럭’, ‘보리숭년’, ‘땡볕’, ‘얼개빗’, ‘쇠그릇’ ‘문둥이 장타령’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마지막 5연에 이르면 ‘대숲 바람 소리’는 변화가 일어난다. 서민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대숲 바람 소리는 ‘푸른 종소리’처럼 민중의 서슬 퍼런 한(恨)이 담겨 있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것이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소리’가 된다고 진술함으로써 원한과 증오를 곰삭여 낸, 청청한 민중의 숨결이 된 상황을 형상화한 것이다.

 

▲송수권(宋秀權, 1940 ~ )

  시인, 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남도의 서정과 질긴 남성적 가락으로 한민족의 한과 부정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3), 《아도(啞陶)》(1985),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7), 《벌거숭이》(1987),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등이 있으며, 장편서사시 <동학란>(1975)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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