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 / 복효근
by 혜강(惠江)
2020. 6. 9.
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
- 복효근
천변* 잔디밭을 밟고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하자 잔디밭에 외줄기 길이 생겼다 어쩌나 잔디가 밟혀 죽을 텐데 내 걱정 아랑곳없이 가르마 길이 나고 그 자리만 잔디가 모두 죽었다 오늘 새벽에도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데 멀리서도 보였다 죽은 잔디 싹들이 사람의 몸 속에 푸른 길을 내고 살아있는 것이 푸른 잔디의 것이 아니라면 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저렇게 청량하랴* 걷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얘기 소리에서 싱싱한 풀꽃 냄새가 난다 그제서야 나는 잔디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비켜서 있거나 아예 사람 속에서 꽃피고 있음을 안다 그렇듯 언젠가는 사람들도 잔디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도 알겠다 죽음이 푸른 풀잎처럼 반짝이는 순간도 이렇게는 있다
- 《시와 정신》(2004) 수록
▲시어 풀이
*천변 : 냇가의 주변. *청량하랴 : 소리가 맑고 깨끗하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잔디가 사람 속에서 되살아났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순환적 질서와 조화를 노래한 생태 시이다.
화자인 ‘나’는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잔디를 보며 자연의 질서를 생각한다. 화자는 죽은 잔디가 사람의 몸속에 되살아나게 되었음을 새롭게 깨닫고, 나아가 사람들이 잔디에게 다시 자리를 내어주며 배려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잔디와 사람이 서로 긍정적 영향을 주는 선순환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재로 한다.
일상적인 경험을 소재로 생각을 펼쳐나가는 이 시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다른 자연물과 함께 순환적 질서에 놓여 있다는 생태적 깨달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심오한 깨달음을 시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과 같이 하나의 심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청각의 후각화와 같은 감각의 전이(轉移)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6행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잔디밭을 밟고 걷기 운동을 한 후, 잔디밭에 외줄기 길이 생겼다‘며 잔디가 죽은 상황을 제시한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때문에 자연이 파괴된 모습이다. 7~16행에서는 잔디가 죽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서 잔디의 푸름과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화자의 인식이 드러난다. 화자는 사람들의 청량한 말소리와 웃음 소리에서 생생한 풀꽃 냄새가 난다며, ’죽은 잔디 싹들이 사람의 몸속에 푸른 길을 내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자연의 생명력이 사람에게 전이(轉移)되었음을 의미하며, 죽은 잔디가 인간을 통해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인식(認識)의 전환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잔디가 사람의 몸속에서 꽃피었다는 진술로 형상화된다. 17~19행에서 화자는 잔디가 사람들에게 길을 내어 준 것처럼 사람들이 잔디에게 자리를 내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 긍정적 전망은 인간과 자연이 순환적(循環的) 질서에 놓여 있다는 생태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이러한 사고는 ‘인간과 자연의 순환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화자의 주제 의식과 통하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이 비록 잔디를 파헤쳤지만, 그 잔디는 인간에게 푸른 마음을 주었고, 그 푸른 마음이 언젠가는 잔디를 배려하는 인간으로 만들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자, 제목대로 사람에게 밟혀 죽는 ‘잔디’에게 덜 미안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주는 잔디의 훼손과 생명력의 회복을 소재로 인간과 자연의 순환적 질서와 조화라는 대명제에 닿아 있다.
▲작자 복효근(卜孝根, 1962 ~ )
시인. 1991년 《시와 시학》에 <새를 기다리며> 등으로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자연의 소재로 일상의 생각과 성찰을 노래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1993), 《버마재비 사랑》(1996), 《새에 대한 반성문》(2000), 《목련꽃 브라자》(2005), 《어느 대나무의 고백》 (200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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