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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by 혜강(惠江) 2020. 8. 13.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嶺)*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시집 《분수령》(1937) 수록

 

 

 

◎시어 풀이

 

 

*침상(寢牀) : 누워서 잘 수 있도록 만든 기구.
*노령(露領) : 러시아 영토.

*자래운: 자라게 한, 키운.

*아무을만(灣) : (지명) 러시아의 아무르 지역

*파선(破船) : 풍파를 만나거나 암초 따위의 장애물에 부딪혀 배가 파괴됨.

*설룽한 : ‘썰렁한’의 방언. 서늘한 바람이 불어 조금 추운 듯한.

*니코리스크 : 니콜라옙스크(러시아의 도시 이름).

*갈앉고 : ‘가라앉고’의 준말

*미명(未明) : 희미하게 밝은. 혹은 ‘무명’(얼굴을 덮는 천)의 오기(誤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국땅에서 임종을 맞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일제의 강압적 수탈 때문에 해외 등지로 유랑해야 했던,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타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담담한 어조와 객관적인 태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당시 해외에서 유랑해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비애를 묘사하고 있다.

    

   화자 자신의 체험을 직접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청각적인 표현과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비극성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지명을 통해 사실감을 높이고, 아버지의 최후를 절제된 감정으로 객관화하여 나타내고, 수미 상관의 구성을 통해 안정감을 주고 여운을 형성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비참한 심정을 ‘풀벌레 소리’에 투영하여 담담한 어조로 제시한다. 아버지는 타향에서 ‘침상도 없는’곳에서 ‘최후의 밤’을 맞이했다며, 비참한 임종을 알린다. 그날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에서 ‘풀벌레 소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내는 상관물로서, 어버지를 잃은 화자의 비참한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2연에서는 유랑하던 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임종 모습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는 러시아 지역을 유랑하면서 애써 키운 자녀들에게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고, 유랑지의 춥고 고달픈 삶을 뒤로 한 채 갑작스럽게 객사(客死)한 것이다. ‘노령, 아무을만, 리코리스크’ 등의 공간적 배경을 제시함으로써 아버지의 유랑하던 삶의 모습과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3연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의 장면을 감정을 절제한 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화자는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의 감은 눈이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처럼 가라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이 식어가고, 마지막으로 숨이 멎는 순간을 되도록 감정을 절제하면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라는 것은 흰 천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덮었다는 의미로, 아버지의 마지막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역시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죽음의 현장을 객관적인 묘사와 사건의 제시를 통해 장면 위주로 전달하는 방법은 감정 절제를 통해 더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전해 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4연의 마지막 2행은 1연의 4, 5행이 반복되어 수미 상관의 구조를 이루면서 주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강한 정서적 여운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풀벌레 소리’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느끼는 화자의 참담한 내면 심경을 대변하는 동시에 ‘최후의 밤’에 가득 찬 ‘풀벌레 소리’는 화자의 슬픔의 강도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는 일제에 의한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로, 이를 피해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살길을 찾아간 곳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만주 간도 지방과 구소련의 사할린, 연해주 지역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일제 강점기에 타국을 유랑하던 한 가장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일제 강점기 유랑민의 참담한 실상과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자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시인.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5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한 후 6·25 때 월북. 그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 등지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시집으로는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등이 있다. 1949년 현대시인전집의 제1집으로 〈이용악집〉이 나왔다. 월북 후, 남한에 《이용악 시전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등이 출간되었다.

 

 

 

►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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