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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결빙(結氷)의 아버지 / 이수익

by 혜강(惠江) 2020. 8. 8.

 

 

 

 

결빙(結氷)의 아버지

 

 

 -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시집 《불과 얼음의 콘서트》(2002) 수록

 

 

◎시어 풀이

 

*결빙(結氷) : 물이 얼어 얼음이 됨. 동빙(凍氷).

*적산가옥(敵産家屋) : 자기 나라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敵國) 소유의 집.

*다다미방 : 일본식 돗자리인 다다미를 깐 방.

*화신(化身) : ①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남. 또는 그 모습. ② 추상적인 특질이 구체화 또는 유형화된 것.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성인이 된 화자가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백하듯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차분하면서도 애틋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변화가 시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시는 과거와 현재의 대응을 통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즉 고가의 ‘아버지’는 현재의 ‘이승의 물’로, 과거 ‘겨울밤의 외풍’은 현재의 ‘영하의 날씨’로, 과거 ‘어린 나’는 현재의 ‘여린 물살’로, 과거 ‘추위에 떠는 어린 나를 가슴팍에서 잠들게 한’ 표현은 현재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품 안에서 부드럽게 바다로 흐르는’ 것과 대응시켜 아버지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어머니와의 대화 형식으로 경어체를 사용함으로써 친밀감을 높여주고 있다. 또한

 

  모두 3연으로 된 이 시는 1연에서 과거 회상을 통하여 예닐곱 살 적 외풍을 막아 주던 아버지를 묘사하고, 2연에서는 성년이 된 지금 자식을 통하여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3연에서는 오늘 영하의 한강 얼음을 통하여 아버지를 연상하며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어렸을 때 패전으로 일본인이 버리고 간 집 이층에서 겨울을 나던 기억을 떠올린다. 예닐곱 살 어린 화자는 외풍이 울어대던 추운 밤, 온기 없는 다다미방에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집어넣고, 가슴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묻어야만 겨우 잠들 수 있는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랑이와 가슴팍을 내어주시던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

 

  2연에서는 화자가 성년이 되어 추운 밤 잠든 아이들에게 이불깃을 덮어 주며, 어린 시절 자신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며 마음 아파한다. 세월이 지나 그때의 아버지는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서도 옛날처럼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다’라고 한다. 사랑을 마음껏 주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한 줌 뼛가루’와 ‘붉은 흙’의 색채 이미지의 대조가 돋보인다.

 

  3연에서 성인이 된 화자는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꽁꽁 얼어붙은 강물을 본다. 화자는 이 강물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데, 물이 잘 흐를 수 있도록 단단하게 얼어붙어 표면을 이루고 있는 얼음을 보고 옛날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한 듯, 마치 아버지와 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목 그대로 ‘결빙(結氷)의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결빙(結氷)의 모습’이, 단단하게 자식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식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모두 자신이 덮어 주고 품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인식한 것이다.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린’의 시구는 2연의 ‘한 줌 뼛가루’와 연결되어 감각적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말없음표로 끝낸 것은 여운을 두어 아버지의 큰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무한한 그리움을 확대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무심히 한강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발견한 순간, 얼음 조각이 순식간에 아버지로 변신하는 부분은 참 놀라운 장면이다. 아래의 자잘한 물살들을 품어주는 얼음 조각이 마치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아내던 아버지의 등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비록 한강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아들은 좋은 기억, 훌륭한 유산을 받았다고나 할까?

 

 

▲작가 이수익(李秀翼, 1942~)

 

 

  시인, 경상남도 함안 출생. 196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고별>, <편지> 등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 일상의 사소한 사물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적 체계 속에 담아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결빙의 아버지》, 《고별》, 《야간열차》(1978), 《우울한 샹송》(1969), 시선집 《슬픔의 핵》(1983), 《단순한 기쁨》(1986), 《그리고 너를 위하여》(1988), 《아득한 봄》(1991), 《푸른 추억의 빵》(1995),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2000), 《불과 얼음의 콘서트》(2002),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2010), 《천년의 강》(2013), 《조용한 폭발》(2020)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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