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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성에꽃 / 최두석

by 혜강(惠江) 2020. 9. 30.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시집 《성에꽃》(1990) 수록

 

 

◎시어 풀이

*성에 : 추운 겨울, 유리창이나 벽 따위의 찬 곳에 수증기가 허옇게 얼어붙어 생긴 서릿발

*성에꽃 : 성에가 유리창 따위에 끼어 있는 모습을 꽃에 비유한 말.

*엄동 혹한 : 몹시 추운 겨울의 심한 추위.
*선연히 : 실제로 보는 것같이 생생하게.

*섬세하다(纖細―) : ① 곱고 가늘다. ② 아주 찬찬하고 세밀하다.
*푸석한 : 핏기가 없이 약간 부은 듯하고 꺼칠한.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새벽 시내버스 창에 핀 성에를 통해서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시대 현실에 대한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자연물인 ‘성애’를 통해 힘든 현실 속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형상화하고,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화자의 생각을 드러내고, 감각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사물을 그려내는 동시에 화자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감성과 지성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하여 어두운 현실을 잔잔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 22행으로 구성된 단연시로서, 화자가 새벽 버스 차창에서 우연히 ‘성에’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가난한 삶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감정을 표출하고, 불의한 시대에 맞서다 구속된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내용으로 보아 그것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에서 화자는 우연히 새벽 버스 차창에서 성에꽃을 발견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서민들의 숨결로 태어난 버스 차창의 성에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세 번째 부분에서 빈 버스의 창가 자리를 돌아다니며 가난한 삶들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형상의 성에꽃에 연대의 감정을 표출하며, 네 번째 부분에서 화자는 불현듯 버스 차창을 통해 같은 길을 걷다가 구속되어 지금은 만날 수도 없는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한다. 이처럼 이 시는 개인적인 체험과 시대적인 경험을 연결시키고 있다.

 

  1~2행에서 화자는 우연히 탄 새벽 시내버스 차창에 아름답게 ‘성에’가 낀 모습을 목격한다. 3~10행까지는 성에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엄동 혹한 추위에 ‘선연히 피는 성에꽃’, 산뜻하고 아름답게 핀 꽃이다. 그런데 그 꽃을 보면서 화자는 ’성에꽃’이 만들어지기까지 영향을 준,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사람들’ -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를 떠올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화자가 떠올린 사람들의 면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익명의 대중들, 특히 버스에 고단한 몸을 싣고 출퇴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번득이는 기막힌 아름다움’을 지닌 ‘성에꽃’은 ‘엄동 혹설’의 불행한 현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가난한 삶에 대한 애정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11~19행에서 화자는 버스 차창에 핀 ‘성에꽃’을 구경하기 위해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성에꽃’을 통해 서민들의 삶을 추측하고 있다. 화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전람회에 와서 그림 구경하는 것에 빗대어 ‘꽃이피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차가운 아름다움’은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피워낸 꽃이니 차가운 아름다울 수밖에, 서민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는 화자의 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서민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는 화자는 ‘성에꽃’에서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을 발견한다. 여기서 ‘한숨’은 서민들의 힘겨운 삶의 애환이며, ‘정열의 숨결’은 서민들의 열정과 강인한 생명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화자는 입김과 손가락으로 ‘성에꽃’을 지워도 보고 차가운 창에 이마를 대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서민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의 표현으로 이들과의 연대의지(連帶意志)를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 20~22행에서 화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연대에의 의지를 넘어서서 불현듯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라며, 오랜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여기 등장하는 친구는 표현 그대로, ‘면회마저 금지된’ 영어(囹圄)의 몸이다. 이는 자유를 억압받았던 딩시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모름지기 이 친구는 모순 가득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화자가 시내버스 창에 어린 푸석한 얼굴을 통해 떠올린 친구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친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화자가 그 친구와 함께 오랫동안 길을 걸어왔다는 표현을 통해, 그 길이 민중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실천하는 삶의 길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버스 차창에 낀 ‘성에꽃’에서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가난한 민중들의 모습과 특히 특정 시대를 상징하는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대의 아픔으로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작자 최두석(崔斗錫, 1956 ~ )

 

  시인 · 문학평론가. 전남 담양 출생.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엄정한 현실 인식과 섬세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시’를 주로 썼다. 시집으로 《대꽃》(1984), 《임진강》(1986), 《성에꽃》(1990),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1997), 《꽃에게 길을 묻는다》(2003), 《투구꽃》(2009) 등이 있다. 이외 평론집으로 《리얼리즘의 시정신》, 《시와 리얼리즘》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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