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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한계(寒溪) / 천양희

by 혜강(惠江) 2020. 9. 28.

 

 

 

한계(寒溪)

 

 

-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 소리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5) 수록

 

 

◎시어 풀이

 

*한계(寒溪) : 차가운 계곡

*늑골(肋骨) : 흉곽을 구성하는 활 모양의 뼈(좌우 열두 쌍). 갈비. 갈비뼈.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인간의 절박한 내면세계를 '한계령'이라는 고개에 비유하여 존재의 한계 상황에 대한 인식을 그려내고 있다. 본래 ‘한계(寒溪)’는 ‘차가운 계곡’이라는 뜻이지만, 이 시에서 시인은 극한 상황에 다다름을 뜻하는 동음이의어 한자 ‘한계(限界)’로 제시하여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한계’라는 말을 통해 극한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고, 이는 더 이상 나아가지도, 물러날 수도 없는 화자의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화자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한계령’에 비유하여 존재의 한계 상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데, 점층적 시상 전개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강하게 표출하고, 현재형 어미를 사용하여 화자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라고 진술한다. ‘한밤중’은 외로움과 대면하는 시간으로 이는 화자가 한밤중에 혼자 깨어 한계령에 놓인 것 같은 쓸쓸함과 고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2연에서는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라고 하여, 화자의 쓸쓸한 내면, 고독한 심정을 촉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3연에서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 소리’는 극한의 상황과 마주친 화자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화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존재의 극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계령 바람 소리‘는 화자와 동일시되는 대상인 것이다.

 

  마지막 4연에서는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라고 진술한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한계 상황에 직면한 화자는 ’눈보라 속에 놓인‘ 존재의 한계와 마주친 인간의 극한적 상황 앞에서 ’언 몸 그대로‘ 절망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고통스럽게 토로하고 있다.

 

 

▲작자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에 <정원 한때>, <아침>, <화음> 등의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하였다. 감성적이고 진솔한 시로 독자들과 친숙해졌고, 오랜 연륜에서 오는 중후함과 인생의 운명에 결연히 대결하는 자세가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1994),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1998), 《오래된 골목》(1998), 《하얀 달의 여신》(1998), 《너무 많은 입》(2005) 등과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199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2011) 등이 있다.

  천양희 시인은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겪었고, 그것의 일부가 시를 통하여 표현되었다. 결혼 생활 동안 시작(詩作) 활동을 하지 않다가, 이혼 후 다시 시작했을 때에는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그것을 극복하고, 인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세상과의 화해를 이룩하는 내용의 시들을 쓰며 더 정진해갔다. 시의 경향이 다소 모호하고 부분적으로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진솔한 감정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며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작성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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