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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청포도의 사상 / 이효석

by 혜강(惠江) 2017. 12. 20.

 

<수필>

 

청포도의 사상 / 이효석

 

 

  육상으로 수천 리를 돌아온 시절의 선물 송이의 향기가 한꺼번에 가을을 실어 왔다. 보낸 이의 마음씨를 갸륵히 여기고, 먼 강산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눈앞의 가을에 눈을 옮긴다. 남창으로 향한 서탁이 차고 투명하고 푸르다. 하늘을 비침이다. 갈릴리 바다의 빛은 그렇게도 푸를까. 벚나무 가지에 병든 잎새가 늘었고, 단물이 고일 대로 고인 능금 송이가 잎 드문 가지에 젖꼭지같이 처졌다.

  외포기의 야국이 만발하고 그 찬란한 채송화와 클로버도 시든 빛을 보여 준다. 그러건만 새삼스럽게 가을을 생각지 않는 것은 시렁 아래 드레드레 드리운 청포도의 사연인 듯 싶다. 언제든지 푸른 포도는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까닥이다. 익은 포도알이란 방울방울의 지혜와 같이도 맑고 빛나는 법인 것을, 푸른 포도에는 그 광채가 없다. 물론 맛도 떫었으나, 하기는 기자릉의 수풀 속을 거닐 때에도 벌써 긴 양말과 잠방이만의 차림은 설락하고 어색하게 되었다. 머리 위에서는 참나무 잎새가 바람에 우수수 울리고 지난 철에 베어 넘긴 정정한 소나무의 고목이 그 무슨 짐승의 시체와도 같이 쓸쓸하게 마음을 친다. 서글픈 생각을 부둥켜안고 돌아오노라면 풀밭에 매인 산양이 애잔하게 우는 것이다. 제법 뿔을 세우고 새침하게 수염을 드리우고 독판 점잖은 척은 하나 마음은 슬픈 것이다.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영원한 이방의 나그네같이 일상 서먹서먹하고 마음 어리게 운다.
 

  집에 돌아오면 나도 그 자리에 풀썩 스러지고 싶은 때가 있다. 산양을 본받아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감상이 별안간 뼛속에 찾아드는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벌레 소리니, 가을 벌레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연달아 운다. 눈물 되나 짜 내자는 심사일까. 나는 감상에 정신을 못 차리리만치 어리지는 않으나 감상을 비웃을 수 있으리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울 것 없는 생활의 영원한 제목일 법하니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성적일까. 신비 없는 생활은 자살을 의미한다. 환상 없이 사람이 순시라도 살 수 있을까? 환상이 위대할수록 생활도 위대할 것이니 그것이 없으면서도 찹찹하게 살아가는 꼴이란 용감한 것이 아니요, 추잡하게 측은한 것이다.

  환상이 빈곤할 때 생활의 변조가 오고 감상이 스며드는 듯하다. 청포도가 익은 것이요, 익어도 아직 청포도에 지나지는 못한다. 시렁 아래 흔하게도 달린 송이송이를 나는 진귀하게 거들떠볼 것이 없는 것이요, 그보다는 차라리 지난 날의 포도의 기억을 마음 속에 되풀이하는 편이 한층 생색 있다.

  성북동의 포도원, 삼인행, 배경과 인물이 단순한 하나의 꿈이 그처럼 풍요한 때도 드물다. 나는 그들의 치마와 저고리의 색조를 기억하지 못하여 얼굴의 치장을 생각해 낼 수는 없으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꺼져 버린 비늘구름과도 같이 일률로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다. 누렇게 물든 잔디 위에 배를 대고 누워 따끈한 석양을 담뿍 받으며 끝물의 포도빛을 바라보며 무엇을 이야기하였으며, 어떤 몸을 가졌는지 한 마디의 과백도 기억 속에 남지는 않았다.

  산문을 이야기하고 생활을 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결코 현실의 회화여서는 안 된다. 천사의 말이요, 시의 구절이 있어야 될 것 같다. 검은 포도의 맛이 아름다웠던 것은 물론이다. 이 추억을 더 한층 아름답게 하는 것은 종중의 한 사람이 세상을 버렸음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뒷소식을 알 바 없다. 영원히 가 버렸으므로, 지금에 있어서 잡을 수 없으므로 이 한 토막은 한없이 아름답다―신비가 있었다. 생활이 빛났다. 지난 날의 포도의 맛은 추억의 맛이요, 꿈의 향기다.

  가을을 만나 포도의 글을 쓸 때마다 이 추억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것이 청포도가 아니고 검은 포도였기 때문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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