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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 / 이희승

by 혜강(惠江) 2014. 1. 11.

청추수제(淸秋數題)

 

 

 이희승

 

 

 

벌 레 

  낮에는 아직도 9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이 전초역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을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인젠 확실한 가을이로구나!' 하는 영추송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한다.

 

달 

  전들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 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 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성결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쫓겨 들어왔다.



이 슬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창공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는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을 동경하였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 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독 서

   '서중 자유 천종록'이란, 실리주의에 밝은 중국 사람에게 있을 법한 설법이렷다. 그러나, '속대 발광 욕대규'한 형용이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 더위에, 만종록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 삼매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한 사람이 있을라고. 지나친 자아류의 변설인지는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 줄이나 하였다고 장담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려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히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필자 이희승(李熙昇)

 

 본관은 전의(全儀). 자는 성세(聖世), 호는 일석(一石).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국어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중앙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30세가 넘는 만학으로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급 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어학회'에서 학회활동과 국어연구에 주력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어 해방될 때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해방 후 경성대 교수로 있다가 1946년 학제개편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한글맞춤법 강의〉(1946)를 비롯하여 〈조선어학논고 朝鮮語學論考〉(1947)·〈초급국어문법〉(1949)·〈국어학개설 國語學槪說〉(1955) 등 그의 국어학 관계 대표저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국어사전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국어대사전〉(1961)의 간행을 이루었다. 1961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 동아일보사 사장, 대구대학교 대학원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 현정회(顯正會) 이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학문활동·후진양성·사회활동 등을 활발히 했다.

 

  그가 주로 학문활동을 하던 시기는 어문정리와 규범문법의 확립에 관심이 모아지던 때였다. 그러한 시대상황과 학문적 분위기에서 규범문법을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규범문법체계의 특징은 〈초급국어문법〉에 그 전모가 최초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국어의 품사를 10품사(명사·대명사·조사·동사·형용사·존재사·관형사·부사·접속사·감탄사)로 분류했는데, 종전의 지정사(指定詞)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체언의 활용어미로 처리한 점과 수사를 대명사에 포함시키고 접속사를 독립품사로 설정한 점 등 독특한 품사분류체계를 보여준다. 또한 어절(語節)의 개념을 도입하고 문장성분을 7성분(주어·서술어·수식어·한정어·목적어·보충어·독립어)으로 나누는 등 후대의 규범문법 정립에 끼친 영향이 크다. 그는 규범문법의 정립에만 그치지 않고 근대적인 학문으로서 국어학의 체계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연구는 〈국어학개설〉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음운론·어휘론·문법론에 두루 걸쳐 국어의 제반현상에 대한 치밀하고도 섬세한 기술의 체계를 보여준다. 국어학 분야에 있어서 이룩된 업적들은 그뒤로도 많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어 현대 국어학 발전의 토양이 되었다.

 

  그는 국어학 외에도 고전문학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조선문학연구초 朝鮮文學硏究抄〉(1946) 등을 펴냈고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으로 〈박꽃〉(1947)·〈심장(心臟)의 파편(破片)〉(1961) 등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자서전적 수필 〈딸깍발이〉(1952)·〈오척단구 五尺短軀〉(1956) 등을 비롯하여 〈벙어리냉가슴〉(1956)·〈소경의 잠꼬대〉(1962)·〈먹추의 말참견〉(1975) 등의 수필집을 남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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