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염산교회
77명이 순교한 한국교회 최대 순교지
- 공산군에 의해 몽둥이와 죽창으로 찔리거나 수장당해 -
글·사진 남상학
전남 영광군은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3대 종교성지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 영산성지와 불교의 도래지 그리고 개신교위 순교지를 보유하고 있는 종교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전국 최대의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종교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인 셈이다.
전남 영광은 6·25 당시 194명이 순교한 대표적인 개신교 순교지로 꼽히는 곳이다. 그 중에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담임목사:김태균, 061-352-9005 )는 당시 전체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 공산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한국 기독교 최대 순교지로 불리고 있다.
전쟁 당시 염산교회에는 독립군 출신의 김방호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영광일대가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고, 교회당이 공산군의 사무실로 징발된 후에도 김 목사는 교우들과 마을에 남아 초대교회 카타콤처럼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켜왔다. 사건은 9·28 수복 후 북진하는 국방군의 환영대회를 염산교회 청년회가 앞장서 주도하면서 비롯됐다. 아직 후퇴하지 않고 남아있던 공산군들과 좌익세력이 이에 대한 보복을 자행하면서 엄청난 살육이 이어졌다.
10월 7일 환영대회에 앞장섰던 기삼도, 노용길 등 청년들을 처형하고, 교회당을 불에 태운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튿날부터는 염산교회 교인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몽둥이와 죽창으로 가족단위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마을 앞 설도포구의 수문통에는 무려 77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목에 큰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되고 말았다.
초대교역자였던 이신 장로, 2대 교역자였던 원창권 목사, 3대 교역자였던 김방호 목사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전 교인의 2/3가 희생된 기막힌 사건이었다. 이들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찬송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그들의 신앙은 위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 홀로 살아남은 김방호 목사의 차남 김익 전도사가 부임하여 염산교회의 명맥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한다. 김 전도사는 학살의 주범이던 좌익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남아있다.
기념관 안에는 1951년 10월 26일 염산 교회 합동 추모식에 즈음하여 김준곤 목사의 헌시가 걸려 있다.
하로밤 사이에 휘리 바람처럼 /
붉은 군대가 지옥의 나라에서 / 쏟아져 나오든 날 /
평화의 목장 / 어린 양무리 / 사망의 나례밑에 / 물리고 찌끼고 짓밢였도다 /
어두운 밤 질식의 시야 / 아이야 숨소리 죽여라 / 바람도 자라 / 햇빛 가리워라 /
숨켜만 다오 / 김일성이다 내무소원이다 / 생명아 번데기처럼 속에서만 숨쉬라 /
피에주린 살인마들 / 젓먹이 안고 업고 / 내 어머니 내 아버지 /
도살장으로 학살의 골짝으로 / 소처럼 개처럼 /
숙정가 발마추워 / 말없이 끄을려 갔도다 /
돌․매․창․칼 / 모진 아픔 아래서 / 오 - 주여 / 쓰러지는 신음소리 /
악마들 어이 이리 잔인하고 / 독사들 어이 이리 독할건가 /
듣는가 친구여 / 칠십 생령의 피의 호소를 / 바다야 산들아 울자 /
하늘이여 보시고 땅들아 잠자지 말라 / 오늘 이 고장에서 / 나와 같이 통곡하자 /
누가 비저낸 비극의 장이든고 / 누가 뿌린 죄의 씨드냐 / 누가 쌓은 파멸의 탑이더냐 /
아 - / 싸움의 종자 / 권력상쟁 끄칠줄 모르드니 / 기여이 생혈을 강같이 흘리었으니 /
행악의 종자여 피흘린 백성이여 / 그대 아즉도 뉘우침이 없는가 /
평안이 쉬라 형제여 자매여 / 눈보라 가시길 기나긴 겨울이 가면 / 아즈랑이 맴도는 /
평화의 봄이 이땅을 차즈리니 / 피흘린 발자욱마다 /
향기로운 승리의 꽃물결 이루고 승리/ 꽃가루 안개같이 무너져 /
나비와 별도 나라오고 / 사람 사람 다 향기로워 /
독사도 사자도 암사슴되고 / 아이 독사굴에 손을 넣는 날 /
범이 초식을 하는날 /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 환이에 봄은 /
평화의 소식가지고 / 저녁노을같이 / 이 피흘린 땅을 더 무리니 /
영광을 누리시라 안식을 누리시라 / 뼈앞은 현실 괴롭히는 죄도 / 사망도 다 지나가고 /
눈부신 환희․안식․생명만이 / 넘치리라 / 피에부쳐 기도하는 땅 /
찌낀 살 맞은 뼈 마디 마디에 / 순교의 결실 / 백배 천배 거둘것 많겠네 /
님들 가신골고다 / 피묻은 자욱 가시길 헤치며 / 뒤따르는 무리 구름같이 미려나리니/
기리 기리 영광을 누리시라 / 평안히 쉬라
폐허가 된 터전에서 다시 일어선 염산교회는 예배당을 다시 세우고,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성경구락부 개설 등 교육사업에 힘쓰는 등 재건에 매진했다. 성경구락부는 이후 염산중학교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이토록 염산교회(김태균 목사)는 그 아프고도 자랑스러운 유산을 간직한 교회이다. 마을 입구를 장식한 ‘순교자의 길’ 표지석을 지나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들을 합장한 거대한 봉분과 순교 기념비, 그리고 그들을 추모하는 십자가 돌탑이 눈에 뜨인다.
본당 옆에는 순교기념관이 서있다. 이 순교기념관 건립사업은 당시 좌우 사상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아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순교자들의 정신이 드러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긴 지역 교계가 앞장을 섰다. 이들은 기독교 순교자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노력한 끝에 2008년 초 영광군의 지원으로 염산교회 내에 300평 규모의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곳 전시관에는 집회실, 전시실, 시청각실, 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들을 갖출 예정이고, 순교체험실을 마련할 예정이다. 그리고 순교기념공원 조성, <77인의 순교사> 발간, 영상물 DVD 제작 등 큼직큼직한 사업들을 진행 중이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맞으며 염산교회 순교의 역사를 차근차근 들려주는 김태균 목사는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의 이면에는 지금도 힘차게 흐르고 있는 순교자들의 피가 자리하고 있다”며, 체험관 시설이 완전히 갖춰지면 “순교자적 신앙과 순교자적 정신으로 신앙을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순교 체험 현장 프로그램을 갖추고 마치 순교사관학교처럼 순교영성캠프 등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당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가로 내려가 보면 순교자들의 흔적과 함께 기념탑이 세워져있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지키려다 순교를 한 영광지역 순교자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는 6.25 당시 영광지역에서 순교한 염산교회와 야월교회의 순교자를 포함해 모두 194명의 순교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조각돼 있다. 야월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전체교인 65명이 모두 북한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믿음의 선조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의 순교의 삶은 자칫 나태해지기 쉬운 지금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염산교회를 비롯한 영광지역 순교지 교회에는 한국기독교 유적지 답사코스로 매년 수천 명씩 순교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광군은 기독교 문화관광 유산으로 이 지역을 정비, 순례자들을 유치할 수 있도록 관련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염산교회 바로 앞의 포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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