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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서천 마량포구,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과 기념공원

by 혜강(惠江) 2017. 6. 24.

 

서천 마량포구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과 기념공원

 

 

글 · 사진 남 상 학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해안 마량포구,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이 전해진 곳으로 알려져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이 개관되고 기념공원도 조성하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마량진 최초성경전래지는 2002년 한 고등학교 교사가 조선왕조실록 48권(순조실록 권19)에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고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연구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면서 발견됐다. 2004년부터는 서천 기독교계와 서천군이 나서 역사적 사실임을 재확인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비로소 역사적 현장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기록에 의하면, 마량포구는 1816년 영국 해군 머레이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서해안 탐사를 위해군함을 이끌고 들어왔다가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1611년에 발행된 영문킹 제임스 성경을 건네주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서천군은 이곳에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을 2016년 9월 4일 개관했다. 연면적 1374㎡에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졌으며 1층과 2층 전시관, 3층 전망카페, 4층 다목적실로 꾸며 2016년 9월 4일 개관했다. 인근에는 9920㎡의 기념공원도 조성하고 기념비도 세웠다.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서인로 89-16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 전시관에는 마량진 최초 성경전래 과정과 알세스트호의 선실을 재현하고 영국에서 제작된 킹 제임스(King James) 성경 원본과 시기별 한국어 성경 번역본 등이 전시돼 있으며,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했다. 먼저 전시관에 들러 마량진 포구에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사건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1816년 9월 4일 오후 3시였다. 마량포구(馬梁鎭) 앞바다에 영국 함대 소속 배 두 척이 닻을 내렸다. 조선인이 목격한 최초의 이양선(異樣船)이었다. 이양선이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서구식 함선이나 상선으로 동양의 배와는 모양이 달라서 붙은 이름이다. 235t짜리 배 리라호(Lyra호, 함장 Basil Hall)가 선두에 섰고, 리라호의 네 배쯤 되는 거함 알세스트호(Alceste호, 함장 Murry Maxwell)가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 두 척의 배는 7개월 전 동인도회사 상업보호를 위해 중국 사절단으로 파견한 윌리엄 애머스트 경 일행을 태우고 영국을 출발했다. 긴 항해 끝에 중국에 도착해 임무를 마친 두 척의 배는 본국으로부터 ‘조선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면서 해도를 작성하라’는 훈령을 받고 조선의 서해안으로 들어와 마량포구에 처음 닻을 내렸다.

 

  이들 배가 마량진에 도착했을 때, 조선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배에 혼비백산했다. 당시 마량진은 성을 쌓고 수군이 진주해 있던 군사기지였다. 수군 부대의 대장 격인 마량첨사 조대복(趙大福),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군수격인 현감 벼슬의 이승렬(李升烈)이 문정(問情) 차 판옥선을 타고 닻을 내린 영국 함선으로 향했다. 영국 함대와 조선 관료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 위에서 마주 선 영국함대의 바실 홀 선장과 조대복, 이승렬 일행은 서로 난감했다. 단 한마디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게 정중했고 우호적이었다. 홀은 조대복과 이승렬 일행이 조정에 올릴 보고서 작성을 위해 배를 조사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 대포를 직접 쏘아 보기도 했고, 탄환을 살펴보라고 내주기도 했다. 홀은 배 이곳저곳을 살피며 세심하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조대복과 이승렬의 성실함에 탄복해 훗날 자신의 여행기에서 조선 관료의 치밀함을 찬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튿날 홀은 조대복과 이승렬을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체리 브랜디와 럼주가 곁들여진 융숭한 식사였다. 식사 후 조대복과 이승렬이 선실에서 지구의 천구의와 서가에 가득한 책들을 보면서 신기한 태도 보였다. 이를 눈치 챈 홀은 책을 선물했다. 이승렬이 먼저 뽑아 든 건 값비싼 브리태니커 사전 전집 중 한권이었으나, 홀은 대신 성경책을 선물로 전달했다. 이게 바로 조선 땅에 최초로 전해진 성경이었다. 이 대목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건 성경책을 받은 이승렬이 답례로 부채를 건네주던 상황이다. 이승렬은 테이블 밑으로 ‘매우 비밀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선장을 쿡쿡 찔러 답례로 부채를 건네주었다. 

 

  해도(海圖) 작성을 끝낸 이들이 출항하려 할 때 첨사 조대복은 며칠 더 기다리면 조정의 답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라호가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알세스트의 함장 맥스웰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쉬워하는 첨사에게 맥스웰은 책 한권을 선물로 남기고 떠났는데, 그것도 성경이었다. 조대복은 아무런 선물도 받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성경)을 주려 했을 때 거절했다. 그러나 선실을 떠날 때 맥스웰이 다시 권했더니 사양하지 않고 감사한 표정으로 받았다고 한다.

 

  첨사에게 성경을 준 장면에 관해 영국측 기록에는 “그는 어떠한 선물도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친절에 무척 기뻐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우리가 성경을 그에게 주었더니 감사한 모양으로 받아 가지고 퍽 우정적인 작별을 고하였다"고 적었다.

 

  성경전래지기념관은 기독교 신자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롭다. 은둔의 나라 조선이 제국을 꿈꾸던 영국과의 첫 만남이란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영국의 함대와 조선 관료의 당혹스러웠을 만남이 충실한 기록과 세밀한 설명으로 생생하게 재현돼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눈에 비친 이방인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자못 흥미롭다.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 3층 전망카페에서 바라본 마량포구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성경의 의미 

 

 

  홀이 떠난 뒤 조선의 조정은 부실한 조사의 책임을 물어 조대복과 이승렬을 파직했다. 이양선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수십 기의 대포로 무장한 배를 과연 무슨 수로 억류할 수 있었을까. 홀마저 탄복할 정도로 성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던 두 명의 관료는 그렇게 억울하게 관직을 잃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아온 성경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 실린 글에 의하면, 정약용은 “책은 가로 세로로 아주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데 2품 이상의 재상들이 모여 보고 나서 몇 장씩 뜯어다가 집안사람들에게 주었다”고 적었다. 영어를 읽을 수 없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어 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읽지 못했고, 뜯겨져 사라져버렸으니, ‘최초의 성경전수’에 값하는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다만 단회적인 역사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량포구 앞바다에서의 첫 성경의 전래는 다만 ‘전해졌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홀은 귀국 후 조선항해 경험을 여행기로 남겼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국에서 은둔의 나라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홀의 항해기에 등장하는 ‘성경을 조선인들에게 전해줬다’는 한 줄의 글은 영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아오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해진 성경은 뜯겨 사라졌지만, 그 성경 전래의 기록이 영국 사회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조선의 선교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그후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하여 한국에 성경이 전래되어 개신교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한 권에 3억 원짜리 성경책  

 

 

  무엇보다 기념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홀이 건넸다는 것과 똑같은 판본의 성경책이다. 1611년 발간된 최초의 영어 완역판 ‘킹 제임스 성경’. 두툼한 가죽 표지의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왕위 즉위 후 최고의 성서학자 54명을 임명해 필사본을 모아 7년 만에 펴낸 것으로 성경사(史)에서도 의미 깊은 책이다.

 

  이 귀한 책을 어떻게 구했을까.  구입 경위는 이렇다. 지난 2015년 성경전래지기념관을 착공하면서 서천군은 1611년판 킹 제임스 성경 찾기에 나섰다. 이 판본은 초기 300여 권이 발간됐으며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30권 안팎. 그중 거래되는 건 5∼6권에 불과했다. 수소문 끝에 미국 피닉스주의 고(古)성경박물관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세계적인 경매사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전문 감정가로부터 1개월에 걸친 감정을 통해 진품임을 확인받고 이 성경책을 구입했다. 기념관에 전시된 성경책의 가격은 3억 원. 함께 구입한 비슷한 시기의 성경책 세 권을 합친 가격의 두 배가 넘는다.

 

  성경 전래의 의미는 사실 전래된 성경 자체보다는, 홀이 펴내 조선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 베스트셀러 항해기 <조선 서해안과 유구(오키나와) 항해기>와 군의관 존 매클라우드가 남긴 <조선해역 및 유구열도 항해기>에 있다. 기념관에는 이 두 항해기의 초판본도 전시돼 있다. 특히 매클라우드가 펴낸 여행기에는 영국함대의 선장과 조선인 관료의 첫 만남 장면이 생생한 삽화로 묘사돼 있다. <참조 -문화일보 박경일의 글>

 

 

 

▲  200여 년 전 우리 땅에 처음 들어온 성경책과 같은 판본의 책. 성경전래지기념관에 전시된 이 책은 자그마치 3억 원에 미국에서 사온 것이다.

 

 

 

 

 

 기념공원의 두 척의 배와 기념비

 

 

 

  기념관에서 포구 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는 최초성경전래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영국 범선(이양선) 조형물 등이 비치된 9920㎡ 규모의 야외기념공원도 있다.

 

  1816년 최초의 성경전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최초 성경전래 당시 마량진 앞바다에 정박하였던 영국 함선 리라호가 실제 크기로 재현되었다. 또, 이를 문정하기 위해 마량진 첨사가 승선했던 조선판옥선을 재현해 놓았다.

 

  우리의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 새로 개발한 군선이다. 임진왜란의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 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

 

  그리고 범선과 판옥선에 보행 데크를 설치하고 공원 일대에 투수블럭 포장 및 야자매트를 설치하여 쾌적하고 안전한 산책로를 조성했다.

 

   또 최초 성경전래지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살려 두 개의 기념비도 설치하였다. 하나는 1816년 9월 5일 영국 해군 Murray Maxwell 대령과 Basil Hall 대령이 순양함 Alceste와 Lyla호를 이끌고 서해안 탐사차 충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들려 해도를 작성하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당시 마량진 첨사로 있던 조대복에게 성경을 건네주었다는 내용의 전래비이며, 또 하나는 文兒 정진삼 목사가 한국 최초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를 기념하며 지은 시를 기록한 기념비이다. 후자의 이 기념비에는 정진삼 목사의  ‘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란 시가 새겨져 있다.

 

 

   예수심장 바울의 선교 열정, 죤 웨슬리의 뜨거운 가슴으로

   당신은 언더우 선교사와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고요한 아침의 나라 제물포 항구에 복음의 닻 내려라,

 

   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

   너는 보았느냐? 그 날의 일들을

   너는 들었느냐? 그 날 최후 님의,말씀을

   너는 아느냐? 그 날의 자상한 이야기를

   지금도 서천 앞 어청도 바다는 유유히 흘러가는데 말이없구나

 

   아펜젤러! 님이시여!

   님은 이 나라의 이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는데

   한 세기를 훨씬 넘게 잊고 지나온 나날들

   미안하고 송구스런 마음으로 님의 숭고한 희생 선교

   순직정신 영원무궁토록 널리 기리고 전하고자

   온 성도들의 마음 정성 사랑담아

   여기 마량포구에 추모 기념비를 세우노라

   파도여 바람이여 구름아 전해다오,

   이 아름다운소식 물보라로 풍랑으로 큰 파도로

   오대양 육대주 우주로 널리 널리 퍼져 나가도록...

 

   - 아펜젤러 최초의 한국감리교 선교사를 기념하며(2006.6.9)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한국최초 성경전래지기념관 인근에 아펜젤러 순직기념관이 들어선 것도 의미심장하다.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한 아펜젤러는 1902년 8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 참석을 위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가다 어청도 앞에서 충돌사고로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 동행했던 조선인 통역사와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했던 것이다. 감리교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서천 마량포구 언덕에 기념관을 세우고 기념공원 안에 아펜젤러 선교사 추모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기념공원 바닥에 새긴 십계명과 성경 말씀

 

 

 

마량진 방파제의 벽화

 

 

 

  마량진이 우리나라에 성경이 처음으로 전래된 곳이라지만, 역사적 현장에서는 비석 외에는 찾을 것이 없었다. 바다 쪽으로 조금 걸어 나가면 만나게 되는 작은 어선들과 등대가 위안이 될 정도다. 그런데 마량포구가 역사적 현장으로 조명되면서 방파제 뚝방에 '마량진 한국최초 성경전래 고증벽화'가 그려져 있다. 성경전래 200주년을 맞아 그린 그림이다.

 

 

   1호 벽화(영국 함선 알세스트호, 리라호의 마량진 출현)

   2호 벽화(마량진 첨사 일행의 리라호 함상 1차 문정)

   3호 벽화(마량진 첨사 일행의 리라호 함상 재방문)

   4호 벽화(영국 함선 일행의 마량진 육지 첫 상륙)

   5호 벽화(한국 최초로 알세스트호 함상에서 성경을 건넴)

 

  서천은 전쟁과 종교, 그리고 식민지 압제가 지나간 땅이다. 사실 우리 땅 어딘들 그런 기억이 없을까. 서천이 이렇게 제 땅에 새겨진 오래전의 기억을 하나둘 살려내고 있는 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포구에서 서해안 유일의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다는 장점과 아울러 주변에 마량리 동백나무 숲과 해양박물관, 춘장대해수욕장, 그리고 홍원항의 축제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관광자원과 연계한 해양문화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마량포구 방파제 둑에서 만나볼 수 있는 벽화들 

 

성경전래지기념관 3층 전망카페에서 바라본 마량포구는 아름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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