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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남한산성 순교성지, 선교 열정을 깨우는 순교의 터

by 혜강(惠江) 2017. 11. 6.

 

남한산성 순교성지

 

선교 열정을 깨우는 남한산성 순교의 터

 

 

글 · 사진 남상학

 

 

 

▲입구 현판

 

 

  삼국시대 이래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약 1천400년 동안 산성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해 왔다. 그런데 왜 남한산성 안에 순교성지가 소재하고 있는 것일까? 천주교와 남한산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남한산성 순교성지를 찾아가 보았다. 

 

 

 남한산성이 천주교 성지가 된 이유

 

 

  결론부터 말하면, 남한산성은 1791년 신해박해(辛酉迫害) 때부터 기해, 병인박해를 거치는 동안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종교의 보고’다. 한강이남 경기지역 교우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교터’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천주교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한산성이 왜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을까?

 

  한마디로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은 조선 후기 포도청을 비롯한 여러 관청이 들어서면서 천주교 박해의 대표적 장소가 됐다. 광주부의 치소(治所,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가 있었고, 그 후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이 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토포사를 겸하면서 형장의 장소가 된 것이다.

 

  토포사는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였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했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붙잡았다. 포도청에서 인력이 모자라면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남한산성 안의 연무관에서까지 천주교 신자를 심문할 정도였다.

 

 

 

▲남한산성 포도청이 있던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

 

 

 

  한국의 천주교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신앙을 키운 토대 위에 세워졌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하는 광주 지역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교 신앙을 지닌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하여 여러 교회가 창설되면서 우선적으로 신앙운동이 전개됐던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인 이벽(李檗, 1754~1785)이 경기도 광주 출신이었고, 교회의 선구자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했고, 1784년 겨울, 거행된 최초의 영세식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에게 세례를 받은 정약용도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공동체를 조성했는데 이 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교우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됐고,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신유박해는 겨우 터전을 잡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에 시련을 안겨주었다. 중국 출신의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고, 대부분의 지도층 신자들도 희생됐기 때문이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후기에 이르기까지 70년간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 현재 이름과 행적이 알려진 순교자는 총 36명이다.

 

 

 

 

 

현재 이름과 행적이 알려진 순교자는 총 36명뿐이다.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하던 연무관 (본래는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곳)

 

 

 

남한산성에서 처음 순교한 한덕운

 

 

  당시 조정에서는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해읍정법(該邑正法)’이라는 영을 내렸다. 즉 모든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는 영이었다. 이에 따라 박해 기간 동안 경기도 양근과 여주 등지에서는 끊임없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다.

 

  박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광주 남한산성에서도 한 신자가 처형을 당했다. 바로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1752~1802)이다.1752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은 교회의 동정을 살펴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상경해 서소문·청파동 등지를 돌아보다가 처형되어 장터에 버려진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 누가 우리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을 살해하여 장터에 던져버렸습니다. 목 졸려 죽은 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나는 잔치 음식을 맛보지도 않고 그대로 둔 채 벌떡 일어나 그 주검을 광장에서 날라다가 해가 진 다음에 묻으려고 어떤 방에 놓아두었습니다. …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진 다음에 나가서 땅을 파고 그를 묻어주었습니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

 

  이 사실이 발각돼 포도청 관리에게 체포됐고, 남한산성으로 압송돼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 김문집, 김주집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됐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 김차의, 김경희, 김윤희, 최지현, 심칠여와 서문 밖의 홍희만, 홍학주, 이천 단대의 정은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돼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아 순교를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형장에 끌려갈 때 한덕운은 일말의 두려움도 찾을 수 없었다. 형장에 끌려가는 동안 그는 턱을 괴는 나무토막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받쳤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망나니에게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달라”고 부탁해 오히려 망나니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결국 벌벌 떨던 망나니는 헛 칼질을 해 세 번 만에 목이 떨어졌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던 천주교 신자들은 시체가 돼 남한산성 동문 옆 작은 문을 통해 버려졌다. 사람들이 통행하는 일반적인 문을 이용하면 불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이름은 ‘동암문’이나 시신이 버려진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작은 문을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렀다. 남한산성 순교성지에서 동암문까지는 약 1㎞. 잘 정돈된 인도를 15분 정도 걸으면 동암문에 닿는다.

 

  신유박해 당시 남한산성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한덕운의 시복식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한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서울 광화문 앞에서 거행되었다. 

 

 

 

남한산성의 피에타, 순교자현양비 앞에 설치되었다.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를 버리기 위해 드나들던 동암문(일명 시구문)

 

 

 

남한산성 순교성지 이모저모

 

 

  남한산성순교성지 초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높이 솟은 현양탑. 높이 4m에 돌 무게만 100t 되는 현양탑은 순교자들이 옥에 갇혀 목에 썼던 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현양탑은 낮은 기와 돌담이 둘러쳐진 잔디밭에 있는 탓에 꼭 작은 성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현양탑 비석에 새겨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한 분씩 마음속으로 외쳐보게 된다. ‘한덕운, 김만집, 김덕심, 김성우, 정여삼, 이화실… . ’  

 

  순교성지 성당(경기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은 언뜻 보면 잘 지은 한옥처럼 보인다. 문 위에 ‘聖堂’(성당)이라는 한자 현판이 이곳이 성전임을 알려준다. 연면적 296.29㎡에 2층 규모로 2015년에 봉헌되었다.


 

 

한옥 모양의 성당 건물

 

 

▲성당 앞에 있는 토마스홀

 

 

 

 

 

  1층에는 성당, 2층에는 성가대석과 성체조배실이 있다. 한옥 형태의 성전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제대 위 십자가상에 달린 예수님은 순교자들처럼 목에 칼을 쓰고 있었다. 또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한덕운의 순교 장면과 남한산성의 모습이 초여름 햇빛에 색색으로 나타났다. 성전 왼쪽 스테인드글라스는 일곱 성사를 표현했고, 오른쪽은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치명한 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순교 모습을 묘사했다.

 

  박해를 받던 순교자들처럼 칼을 쓰고 있는 제대 뒤 예수상도 인상적이다. 성당 외벽에는 참수와 교살, 백지사형 등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성당에서는 주일미사(오후 2시), 평일미사(화~토, 오전 11시), 떼제미사(매월 첫 금요일 저녁 8시)를 시행한다. 그리고 화요일(13:30, 음악과 함께 하는 성체강복), 목요일(13:30, 성지순례), 금요일(11시 미사 후, 연령을 위한 연도) 등 성지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 교회책방을 운영한다. 

 

 

 

 

성당 내부 전면(위)과 벽면

 

 

'십자가의 길'에서 강론을 듣고 있는 신자들

 

 

야외미사를 드리는 곳 (넓은 돌은 제대)

 

 

남한산성 성지순례 안내도,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박경민 베네딕토 전담신부는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 마사다는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유적지으로 불굴의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민족 성지가 됐다”며 “남한산성의 경우 잊을 수 없는 순교터이면서, 잊어서는 안 되는 성지로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점으로 학생들의 역사의식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구불구불 남한산성의 성벽길 따라 수백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를 흘렸던 아픈 역사가 서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유산등재를 기점으로 성곽 안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한 사람들의 외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정보>

 

 

주소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전화 : 031-749-8522~3)

가는 길 : 서울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로 나와 9번, 15-1번, 52번 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로터리 종점에서 하차, 도보 5분 거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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