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절두산, 서슬 퍼렇던 처형장이 이제는 도시에 포위된 순교 성지로

by 혜강(惠江) 2018. 1. 21.

 

 

한강의 변화 지켜본 절두산

 

서슬 퍼렇던 처형장… 이제는 도시에 포위된 순교 성지로

 

 

황두진(건축가)

 

 

 

처형장이었던 절두산은 이제 순교 성지를 꼭대기에 이고 있다./황두진

 

 

  조선시대 한양 안팎에는 몇 군데 처형장이 있었다. 도성 안에는 지금의 세종로 남단에 있던 군기감이 국사범들의 처형장이었다. 나머지 처형장은 모두 도성 밖 서쪽에 있었다. 현재 서소문공원 사업이 진행 중인 만초천변의 서소문 밖 처형장을 비롯한 용산구의 당고개와 새남터 처형장 등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던 것이 양화진의 절두산, 혹은 잠두봉 처형장이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한 장소다. 대원군은 같은 해 맞물려 일어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진출했던 양화진 인근의 이 장소가 갖는 상징성에 주목했다. 그래서 새남터가 아닌 이곳을 처형장으로 정했다. 조선은 물론 전 세계에 보내는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버드나무 꽃 날리던 언덕에 사람 머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절경으로 유명했던 이곳이 비극의 장소가 된 지 90년이 되던 해인 1956년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이 땅을 매입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즉 병인박해로부터 100년이 되던 1966년에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로 불리는 건물이 들어섰다. 설계자는 이희태다. 김수근, 김중업에 가려져 있지만 시대의 풍운아였던 두 건축가에 비해 훨씬 냉엄한 프로페셔널의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산의 모양을 변형시키지 말 것'이라는 현상설계의 요구 조건을 충실히 구현했다. 다만 순교자의 머리를 내려친 칼, 그들이 쓰고 있던 갓, 토속적인 초가지붕 등 직설적인 요소를 차용하여 이론적으로는 많은 공격을 받았다. 반면 직접 방문하여 건물을 체감한 사람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이 일대는 한강변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게 경관이 변한 곳 중 하나다. 상류에는 이미 1930년에 당인리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있었다. 1965년, 그러니까 이 건물이 한창 지어지고 있을 무렵 하류에 제2한강교, 즉 현재의 양화대교가 완성되었다. 그 북단에 조각가 김세중의 유엔탑이 있었다. 김포 방면에서 서울로 오다 보면 유엔탑과 절두산 순교성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후 잠두봉 지하차도, 강변북로 그리고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등이 들어서면서 순교성지는 지상과 지하에서 사분오열이 되어 버렸다. 유문암으로 구성된 지질이 진동에 취약하여 현재 그 대책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그 너머에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는데 이곳은 뜻밖에도 개신교의 역사 유적지다. 1890년부터 안장이 시작되어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미가요와 대한제국 애국가를 둘 다 작곡한 특이한 이력의 에케르트,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배설, 선교사면서 교육자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묘), 근대사의 독특한 인물인 르장드르 등이 여기 잠들어 있다.

 

 

 

<출처> 2018. 1. 19 / 조선닷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