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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순교정신의 계승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방문기

by 혜강(惠江) 2019. 5. 27.

 

순교정신의 계승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방문기

 

 

 글·사진 남상학

 

 

 

 

손양원 목사 추모상징탑 '사랑의 열매탑'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대에는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총면적 8만 4580㎡인 손양원 목사 유적지는 1,100여 명의 나환자들과 애환을 함께했으며 신앙을 지키다 순교당한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숨결이 살아있는 기독교 테마공원이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안내도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순례 코스로서 공원 안에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비롯하여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탑과 기념비, 3부자 묘, 손양원 목사 자신이 목회했던 성산교회(옛 애양원교회, 1982년 개명)와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용양원)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순례차 유적지를 방문한다면 추모상징탑> 순교기념관> 삼부자묘> 역사박물관> 성산교회 순서로 순례코스를 잡는 것이 이상적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에 나라와 소외된 동포를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을 뿐 아니라 수년간 나병을 앓고 있는 중환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등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여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손양원목사유적공원의 안내 표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으로 향하는 진입로

 

 

  유적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과 삼부자묘소가 있는 중앙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앙 통로인 0.8㎞의 진입로는 ‘용서의 길’이다. ‘용서의 길’ 외에도 진입로 왼쪽 길은 ‘화해의 길’, 오른쪽 길은 ‘고난의 길’로 명명되어 있다. 모두 손양원 목사의 정신이 담긴 길이다.

 

 

손양원 목사의 추모상징탑

 

 

 

 

손양원 목사 추모상징탑

 

 

  용서의 길을 걸어 들어가면 멀리 금빛으로 빛나는 탑이 보인다. 손양원 목사의 추모상징탑이다. 손양원 목사 추모 상징탑은 여수시가 2012년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애양원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공원을 조성할 때 예장통합에서 전국적인 모금 활동을 전개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추모 상징탑 옆에 후원단체와 교회, 개인의 이름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유적공원을 위해 헌금한 단체(교회)와 개인

 

 

 '사랑의 열매탑'으로 불리는 추모상징탑은 9개의 계단을 만들고 세 개의 기둥을 세워놓은 형태의 조형물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수많은 열매가 열린 형상이다. 9계단은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양원 목사가 드린 ‘아홉 가지 감사’를 내포하고 있으며, 세 개의 기둥은 삼부자의 순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손양원 목사의 애칭인 ‘사랑의 원자탄’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달린 열매들은 순교가 씨앗이 되어 열매들이 맺어 간다는 의미이다. 이 추모상징탑은 조각가 김대길 수(전남대 조소과)의 작품이다.

 

 

▲잔디광장(팔복광장)

 

 

 탑을 지나면 드넓은 잔디광장(일명: 팔복광장)이다. 넓은 잔디광장 입구에 적힌 팻말을 보면 유적지가 여수엑스포세계박람회기념으로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조형물 ‘사랑과 용서’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는 조각 작품

 

 

 잔디밭 한쪽에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는 조각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아버지가 탕자의 귀환을 맞이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48년 여순 사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인 동인·동신이 좌익 청년들에게 총살당했으나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킨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뒤쪽에는 두 개의 빈 의자가 놓여있다. 빈 의자는 목숨을 잃은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가 볼 때 그 빈자리는 목숨을 잃은 두 아들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몫(사명)이 무엇인가를 무언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표지석

 

 

 '사랑과 용서'의 조형물을 지나 2층 구조로 된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으로 향했다. 순교기념관은 손양원 목사가 목회했던 애양원교회(성산교회)가 주축이 되어 여수노회 그리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1991년 11월 2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진행해서 1993년 4월 27일에 준공했다.

 

 

▲전시관 개요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기리는 순교기념관 건물은 외양이 시옷(ㅅ)자 형태인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손양원 목사의 성씨의 첫 자음인 ‘ㅅ'을 나타내는 동시에 손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건물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성경의 글귀가 뚜렷하다.

 

 

▲기념관 안내 및 내부 구성도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니 기념관은 건물 벽면이 특이했다. 12면으로 된 벽은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하며, 6계단은 안식일에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원뿔처럼 생긴 천정은 신자가 하늘을 향해야 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알고 나니 더욱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기념관으로 들어서기 전, 손동길 목사를 만났다. 손 목사는 자신이 손양원 목사의 막내아들이며, 아버지가 순교하던 날 아침에 태어나, 장례식 내내 어머니의 품 안에 안겨있던 아기가 바로 자신이며,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며 우리의 안내를 자청했다. 손동길 목사는 거의 매일 기념관에 나와 관람객을 상대로 전시물을 설명해준다고 했다. 후손으로서 아버지의 높은 뜻을 방문자들에게 친절하게 전달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전시물 "당신은 이미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마음을 사로 잡는다.

 

 

 전시실에는 애양원의 시작과 애양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사랑의 사도들의 사진, ‘예수님 생애의 성지’라는 제목의 신윤식의 사진,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 삼부자의 사진 및 유품들이 시기되어 있다.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내용이 담긴 전시물

 

 

 2층에는 손 양원 목사 삼부자의 생애 사진과 손 목사의 옥중서신, 한성신학교 자료들과 많은 고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한완석의 서예와 김동일의 서예 등이 전시되어 있다. 1전시실부터 3전시실까지 2층에서 보고 아래 계단으로 이동하여 4전시실을 방문하고, 애니메이션 실에 들어가서 5분짜리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는 것으로 끝난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설명하는 손동길 목사 

 

 

  손양원 목사의 생애가 연대기별로 게시된 전시물 앞에 서자 손동길 목사는 막힘이 없이 술술 설명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본명은 손연준, 어머니의 본명은 정쾌조이셨습니다. 애양원에 부임하시면서 두 분께서 각각 손양원, 정양원(훗날 정양순)으로 이름을 개명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애양원 가족들과 한 몸, 한마음이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으셨던 것이지요.”

 

 

 

▲손양원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 해방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킨 참 신앙인이요, 사랑의 사도였다.  

 

 

 그런데 손동길 목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손동길 목사는 아버지의 사랑의 삶, 헌신의 삶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전시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잘못된 곳이 있고, 전시된 유품 중에는 진품이 아닌 것도 있으며, 아버지의 행적을 그린 그림도 잘못된 곳이 있고, 유족들을 위한 헌금함을 바깥쪽에 별도로 설치한 이유 등을 얘기할 때 사뭇 혼란이 왔다. (기념관에는 기념관 운영을 위해 건물 내부에 비치해 놓은 헌금함과 외부에 손 목사 개인이 설치한 헌금함이 놓였다.) 한 마디로, 자신은 후손으로서 푸대접을 받고 있으며, 현재 기념관의 운영관리를 맡고 있는 성산교회(옛 이름 애양원교회) 측과의 갈등이 심한 듯 보였다. 

 

 하지만, 방문자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정신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으니 깊은 사정을 알아야 하는 입장도 아니어서 전시된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둘러봤다. 손양원 목사의 약력을 정리해 본다.

 

 

 

 

▲일제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일들

 

 

『손양원 목사(1902.6.3~1950.9.28)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1938년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8월 22일 여수시 율촌면 나병환자들의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나환자들을 위해 목회 생활을 시작했다. 신사참배 반대자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 9월 25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여수경찰서에 투옥되었고, 6년간 옥고를 치르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된 1945년 8월 17일 출옥 후 애양원교회에 다시 돌아와 1946년 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9월 여순사건 당시에는 장남 동인과 차남인 동신이 안재선 등 폭도들에게 순교를 당하였으나 폭도인 좌익 청년 안재선을 그리스도 사랑으로 양자를 삼는 일을 통해 사랑의 실천자로 알려졌고, 1949년 안용준에 의해 이를 기록한 <사랑의 원자탄> 책자가 나왔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때에는 피난가지 않고 나환자들과 함께 병원과 교회를 지키다가 북한군에게 잡혀 1950년 9월28일, 여수시 둔덕동 언덕배기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 당했다.』

 

 

▲손양원 목사의 운구행렬

 

 

 

아홉 가지 감사기도

 

 

아홉 가지 감사기도

 

 

  특히 손양원 목사의 위대한 점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중 두 아들이 순교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는 지금 죽으면 지옥 갈 것이 분명함으로 그 원수를 살려내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게 해야 한다”고 기도했고,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답사를 통해서 아홉 가지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이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 3남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라니요.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명을 채우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라니요. 더욱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 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손동길 목사는 본래 아홉 가지 외에도 열 번째로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가 추가되어 열 가지 감사로 되어야 하는데 전시실을 꾸밀 때의 착오로 누락된 것을 매우 가슴 아파했다.

 

 손양원 목사는 감사의 마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볼 때 그대로 실천한 분이었다. 두 아들이 처형 된 후 첫 주일에 1만원의 감사헌금을 드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목사 생활비로 80원 정도를 받고 있을 때였으니, 두 아들의 순교를 참으로 큰 복, 과분한 큰 복이라고 고백한 것이 감사헌금에서도 그대로 잘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특히 놀라운 일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반란이 진압된 후 손양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사람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손 목사는 안재선 씨의 처형이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자신은 설교 일정이 잡혀있는 터라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 일러 결국 그를 양자로 삼았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하더라도 미움과 원망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이런 용서와 감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손양원 목사는 진정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 성자의 경지에 섰던 분이었다.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말해주는 사진 자료

 

 

 한 마디로, 손양원 목사의 삶은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강한 심장을 가졌지만 애양원 식구들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정도로 한없이 자애로웠던 사람,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던 사람, 그래서 그에게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애칭이 붙었다. 그는 해방 조국에서 얼마든지 더 편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자식 잃는 슬픔까지 감수하며 더 낮은 곳에서 살다 생을 마쳤다.

 

 

순교기념비

 

 

▲순교기념비(박종구 목사 : 순교자)

 

 

 기념관 앞에는 '손양원 목사를 기리며’ 라는 제목을 단 박종구 목사의 시가 적혀 있다. 이 한 편의 시는 순교기념관을 방문하고 느낀 감동을 시의 형식에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순교자는/ 말이 없어라/ 그래서 더 눈부신 빛깔/ 잠든 영혼을 일깨우네.// 받은 것 모두 쏟아/ 텅 빈 우주 순교자/ 그래서 늘 푸른 향기로움/ 마냥 우리를 태운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한 자락 흔들림 없는/ 오직 생명으로 인각된/ 아 님의 발자국이여// 그 날 그 노을 빛 언어/ 오늘은 사랑의 핵이 되어/ 우리의 얼 깊은 곳에서/ 빛무리로 폭발하여라.”

 

 또 하나의 기념비(안산제일교회)에는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고 훈 목사의 시가 젹혀 있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 신앙을 내용으로 쓴 글에는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용서, 화해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말이 아닌 삶으로 본을 보인 그 헌신과 희생, 사랑의 깊이에 그저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다.

 

 

▲순교기념비 (시문 고훈 목사 : 당신은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어설퍼 당신에게 오히려 누가 됩니다.  

버림받은 나환자 피고름을

당신의 입술로 빨아 낼 때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두 아들 동인, 동신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순교제물 되는 날

자식 하나 바친 것도 영광인데

둘씩이나 순교제물 받으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실 때

이미 당신은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아들 난사한 사람

양자로 삼던 날 사랑의 원자탄은 터지고

이 땅에 십자가로 서서

기뻐 하늘 보던 당신은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남해가 보이는 애양원 동산에

당신마저 순교자 되어

두 아들과 나란히 누우셨을 때

당신은 이 땅이 차마 감당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워 오히려 누가 됩니다.

 

 

손양원 목사상 및 12인 순교자들의 부조물

 

 

 

손양원 목사상 및 12인 순교자의 부조물

 

 

  잔디밭 끝에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12인의 순교자들의 부조물이 있다. 2013년 손양원목사순교유적공원이 조성되면서 설치된 것이다. 12명의 순교자 부조상의 한가운데 2.2m 높이의 조형물에는 작은 십자가상과 함께 손양원 목사의 얼굴 부조, 약력, 기도제목 등이 담겨 있다.

 

양원 목사 외에도 또 다른 귀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고흥 광양 구례 순천 여수 등 전남 동부권 일대의 순교자들이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미평과수원으로 끌려가 인민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조상학 목사, 윤형숙 전도사, 지춘철 성도, 지한영 강도사, 허상용 집사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이기풍 목사와 양용근 목사, 6·25 당시 순교한 김정복 목사, 안덕윤 목사, 이선용 목사 등의 이름도 보이며,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삼부자 묘소

 

 

▲삼부자 묘소

 

뒤에 있는 손양원목사와 정양순 사모의 합장

 

 

 발길을 옮겨 삼부자 묘소로 향했다. 5분정도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양지바른 곳에 3부자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삼부자가 순교한 일은 물론 순교자의 가족이 한 곳에 안장된 것은 드문 일로 현재 이 묘역에는 1948년 10월 21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의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의 묘 2기가 앞에 있고 뒤에는 1950년 9월 28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와 1977년 11월 26일 사망한 정양순 사모와의 합장 묘 1기가 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앞서 보내며 "내가 죽거든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묘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묘비에 새겨진 글들을 읽어 보자. 주변에는 조경수가 잘 자라고 탐방로도 만들어 놓아 탐방하기 좋게 꾸몄다.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의 생애' 표지판이 묘지 옆에 서있다.

 

▲묘지가 있는 언덕에서 바라본 순교기념관 

 

▲삼부자 묘소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으로 성산교회(옛 애양원교회) 첨탑이 보인다. 

 

 

 묘지를 탐방하고 주차장 쪽으로 되돌아 나오면 주치장 뒤 길을 건너 언덕으로 오르면, 성산교회와 병원(요양원), 애양원 역사박물관, 손양원 목사순교기념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애양원 역사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우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이었다.

 

 

성산교회와 애양원, 그리고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 역사박물관 앞에 선 손양원 목사순교기념비

 

 

▲성산교회(옛 애양원교회)

 

▲기념비 뒤로 보이는 건물이 애양원 역사박물관이다.

 

 

 

 

▲애양원 역사박물관 내의 전시자료

 

 

 현대식 병원이 세워진 후에는 한동안 양로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그후 개보수하여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의료 기구들, 수고를 아까지 않았던 의료진들의 사진과 환우들의 생활 모습 등 옛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나환자들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둘러볼 수 있다.

 

 

 

▲애양원(요양원)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손양원 목사의 순교신앙을 기리는 성지인 동시에 순교 신앙을 본받는 교육장이다. 시급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 앞에 더 이상의 빈축을 사지 않도록 양보와 화합의 정신으로 유적지 운영에 대한 갈등을 시급히 해결하고 성지로서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신앙 성장을 위한 체험학습장, 수련장,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위한 교육장으로서 발돋움하기 위해서 미비한 시설을 보수하고 확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손양원 목사의 후손, 교단, 그리고 지역사회가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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