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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찾아서

by 혜강(惠江) 2017. 6. 26.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찾아서

충남 서천군 서면 서인로225번길 61 (서면 마량리 251-1) / 041-952-1885

 

 

 

글 · 사진  남 상 학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포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성경이 전래한 뜻 깊은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서천군은 성경 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마량포구를 굽어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경전래지기념관을 지었다.

 

  또 마량리 마을 초입의 더 높은 언덕 위에 미국감리교 선교회에서 한국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첫 선교사 아펜젤러가 성경반포사업차 인천에서 서천으로 가던 중 어청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을 세웠다. 어청도는 거리상 마량리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였다.

 

 아펜젤러순직기념관의 규모는 연면적 350㎡(106평)에 지하1층, 지상 3층 규모로 체험관, 전시관, 선교역사 자료실, 전망대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전망대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인 어청도를 육안이나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아펜젤러순직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마량리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선교사는 구한말 우리나라에 건너와 서구 근대문명을 전파한 기독교 선각자다. 아펜젤러 목사가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 한국선교라는 분명한 목적과 비전을 품고 미지의 땅 한국에 역사적인 첫발을 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제물포였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부활절이었다.

 

  그날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은 아펜젤러 부부를 비롯하여 미국 장로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미국 북 감리교 해외 선교부, 언더우드는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이었다.

 

 

 

 

 

 

   아펜젤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8년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뜨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 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으나 파울러(C. H. Fowler) 감독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한국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도착하여 17년 동안 한국인에게 선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86년 그는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교 종립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교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배재학당의 학훈을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 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어 서울 정동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했으며,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 한국 성서공회의 전신)를 창설하여 1892년 회장직을 맡는 등 성서번역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1895년에 월간지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일을 맡았으며, 1897년에는 한국말로 된 최초의 종교신문인〈죠션 크리스토인회〉를 창간하였다, 그는 단지 선교와 교육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1902년 6월 11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熊川丸)호에 타고 가는 도중, 충남 서면 마량리에서 48㎞ 전방에 위치한 어청도(현재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인근에서 짙은 안개로 반대편에서 오던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동행한 조선인 통역사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출하려고 탈출을 미루고 침몰하는 배에 다시 들어갔다가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마량리에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1858   미 펜실베니아주 서더튼 출생, 루터교 부모(2월 6일)    

  1877   웨스터체스터 주립사범학교 졸업   

  1879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등록    

  1882   프랭클린 마샬대학 졸업  

  1884   E. J.Dodge 양과 결혼    

  1884   한국선교사로 임명   

  1885   Drew 신학교 졸업

  1885   한국 입국(4월 5일 제물포항 도착)

  1885   정동에서 예배 시작(정동 제일교회에서는 창립연도로 확정) 

  1887   배재학당 현판식(3월 14일)    

  1887   첫 한국어 설교(12월 25일)    

  1888   배제제본소(삼문출판사) 설립    

  1889   <교회> 발간(5월)    

  1890   종로서점 설치    

  1890   대한성교서회 회장 피선     

  1892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 발간  

  1895   <Korean Repository> 속간(~1898까지)

  1895   현 정동제일교회 정초식(9월 9일)   

  1897   독립협회 창설(2월 6일),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창간(편집인)   

  1898   감옥에 있는 이승만을 도와줌(12월)   

  1900   신약전서 출판기념예배(9월 9일)   

  1902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5월)    

  1902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비록 44세의 일기로 한국선교 17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그가 이룩한 선교의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1902년 5월, 세상을 떠나기 바로 한 달 전, 아펜젤러는 "나는 한국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시오."라고 유언했다. 동료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은  아펜젤러의 죽음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자기 생명을 성경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아펜젤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한, 우리나라에 최초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였다. 아펜젤러의 사역은 단순히 기독교의 전달자 역할만 아니었다. 암흑과 무지,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참사람이었다. 아펜젤러는 그가 늘 외우던 성경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한 장본인이었다.

 

 

 

 

 

 

 한국선교의 산파역 가우처 홀

 

 

  아펜젤러 순직기념관 옆에 부속 건물로 '가우처 홀'이 있다. 이 건물은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한 '가우처 박사'를 기리고자 서천군이 지은 것이다.

 

 

 

한국선교의 산파역, 가우처(John F. Faucher, 1845~1922) 목사

 

 

 

 

 

  가우처 목사는 아펜젤러에 비해 낯설지만, 메릴랜드(Maryland) 주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가우처대학의 설립자이며 미국 북 감리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로 해외선교부의 출중한 지도자였다.

 

 가우처 목사는 1883년 5월, 미국을 방문한 우리나라 친선 사절단을 만나게 된다. 민영익, 홍영식 등 11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고종이 1882년 5월에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후 파송한 외교사절단인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이었다. 가우처는 이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시카고를 들러 워싱턴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만났다.

 

 가우처 박사는 3일 동안 민영익 일행과 여행하면서 미국이 조선이라는 나라와 새로 수교했고, 놀랍게도 조선에는 아직 개신교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우처 박사는 한국이 선교 개척지가 될 수 있을 것을 직감하고 한국에서 온 이들 사절단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접대하고 조선에 대한 선교 구상을 펴나갔다.

 

 민영익은 조선에서의 교육과 의료, 선교 사업을 요청했고, 가우처 목사는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가우처 박사는 1883년 11월,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한국에 대한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선교자금 2천 달러를 송금하였다. 그리고 감리교 기관지(Christian Advocate)의 편집장 버클리(J.M.Buckley) 박사를 움직여 15회 이상 조선 선교를 촉구하는 기사를 실어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미국 감리교회를 움직였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회는 한국 선교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우처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매클레이((R.S.Maclay)에게 서한을 발송하여 직접 한국을 답사하여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감리교단 극동 지역 책임자인 로버트 매클레이가 고종을 만나 선교를 허락받도록 하고 이후 아펜젤러를 한국 선교사로 파견하도록 한 장본인이다. 가우처 목사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에야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을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목사였다.

 

 

 

 

   ‘가우처 홀’은 아펜젤러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한 '가우처 박사'를 기리고자 건립한 것이다. 이 건물은 방문객을 위한 쉼터와 포토존, 특별전시실 등 다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종교인들에게 휴식과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아펜젤러순직기념관 옆의 동백정감리교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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