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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절두산(切頭山), 그 순교의 현장은 말이 없고 ....

by 혜강(惠江) 2006. 3. 25.

절두산(切頭山) 

 

순교의 현장은 말이 없고, 무심히 한강수만 흐르더라 

 

 

글·사진 남상학

 

 

 

 

 

 

  옛날 양화나루는 풍경이 뛰어났다. 풍경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이곳을 찾았던 문인들은 저마다 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중종 때의 어세겸(魚世謙)은 나루터의 모습을 특히 잘 묘사하고 있다.

 

  버들 꽃 다 날리고 버들가지 줄줄이 늘어졌는데
  밀물이 닥쳐와 기슭이 잠기는구나.
  노 저으며 노래 부르는 나루의 사공
  언덕엔 어부의 딸이 그물을 말리고.

  강변 저 멀리 별장이 보일락 말락
  오는 소, 가는 말이 그치지 않고
  강변에는 장삿배들이 총총하구나.
  해지자 안개는 자욱하고
어기여차 뱃소리는 어디메선고.

 

 

 

 

 

   양화진 일대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또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강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김포ㆍ강화로 가는 나루터인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다.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양화나루(楊花津) 위쪽의 잠두봉'이다. 그 이름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잠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 양화나루는 용산 쪽 노들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의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삼개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이러한 시를 남겼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11월 11일에 사적지 제 39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양화나루(楊花津, 버들꽃나루)와 잠두봉(蠶頭峰) 유적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를 가리킨다. 이렇듯 아름다운 이름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본래 한강을 중심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양화진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한강나루ㆍ삼전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나루의 하나로 진선(津船) 외에 참선(站船), 관선(官船)을 배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나루를 관리하게 하였다. 후기에는 도승 대신 별장(別將)을 두고 진병(鎭兵)을 배치하였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감독 하에 두어 출입하는 선박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양화진의 깊은 강에는 대규모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어서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로 배분되었다. 반면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은 양화진을 한성을 엿보는 외적들이 쉽게 들이닥칠 수 있는 국방의 취약지로 만들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호하진의 전략적 중대성은 더욱 부각 되어 영조 30년(1754)에 군사적 주둔지로서 군진(軍陣)의 설치가 완료되었다. 이로 인해 한때 그 명칭이 양화‘진(鎭)’이 되기도 하였다. 구한말 조선과 서구세력의 물리적 충돌은 주로 수상에서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고자 프랑스 군함 3척이 1866년 9월에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의 척화의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극심해졌다. 대원군은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다. 그는 양이(洋夷)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邪敎)들의 피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고, 전국에 선참후계의 영을 내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자행하였다. 

 

  한강아,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터,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물결 가득 영혼의 빛살로 흐른다.

  한강아,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봇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 이인평 아구스티노의 "영혼의 강" 전문

 

 

 

 


   이런 참혹한 살육으로 당시 잠두봉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가 잘렸고, 그래서 당시의 기록 미비로 현재 40명의 순교자만이 그 이름을 전해오고 있다. 이로부터 목을 잘린 산이라 하여 이후부터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저 절벽 아래로 목이 떨어져 구르고

  성혈 낭자하게 흘러

  절두산이라 이름 붙혀진 오느날까지

  암벽엔 순교의 피빛이 그대로 배어 있다

 

  죽움을 초월한 그날의 선조들

  칼날 번드득이는 박해의 세상 연연하지 않고

  도도히 강에 어리는 영생의 핏빛을

  벼랑바위에 초연히 바라 보았으리라

 

  오히려 사람들이 가슴에 측은히 밟혀

  그들 위에 천주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은

  하늘나라에 초대 받은 기쁨의 표정 이었스리

 

  잠두봉이란 아찔한 바위끝에

  이내 낭떨어지를 굴러 강물에 씻기는 얼굴들

  그 영혼 되비쳐내는 청청한 하늘빛이

  지금은 백합처럼 피어난 성지를 감싸안고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잠두봉이든 절두산이든

  목 떨어진 절벽인데 그날에

  한목슴 던져 피흘린 성인들의 믿음이

  바위 속 까지 스며들어

  피가 거대한 혈암으로 솟아 있다

 

  - 시인 이인평의 <피의 절벽> 전문  

 

 

 

 


   양화진은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金玉均)이 1893년 조선왕실에 의해 효수(梟首)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양화진은 낯선 서구의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세계가 순순히 합류하지 못하고 충돌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곳이었다. 

   1966년 천주교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 땅에 참된 진리와 빛을 남겨준 순교자들의 고귀한 얼을 현양하고자 여기 절두산 순교 터 위에 절두산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1968년에 병인 24위 시복을 기하여 성당지하에 순교복자 유해안치실을 설치하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꾸몄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성당과 기념관을 오르기 전 입구 좌측에는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강는데 중앙탑이 있고, 좌측탑, 우측탑이 서 있다. 이 탑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사진은 차례대로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수교기념탑,

벽면순교자 조각, 난간조각, 기념성당 제대, 상당내부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李檗)ㆍ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와 관련된 조선 후기 학자들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박물관 전시물

 

 

  그리고 광장에는 당시 천주교도들을 참수하던 형구틀도 전시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예수가 체포 되어 십자가에서 운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나타낸 조형물을 따라 예수의 처형을 묵상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는 또 척화비가 있다. 조선 고종 때 대원군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해 서울 각지에 세웠던 석비로 19871년에 건립되었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고 화평을 청한다면 이는 곧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다.)’ 라는 주문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씨로 새겼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치른 뒤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1882(고종 19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가면서 이후 대부분 철거되거나 파묻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1972년에 대지 1,381평으로 확장 개발하였으며 같은 해 애국 선열조상 건립위원회에서 김대건(金大建) 신부를 조국근대화의 선구자로 받들어 동상을 세웠다. 또 광장에는 남종삼(南鍾三)의 동상과 사적비가 있다. 동상 주변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현재 27위 한국성인의 성해가 안치된 이곳에 한국천주교 창설200주년을 기하여 요한 바오로2세 교황성하께서 참배하였다.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개화기의 혼란 속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옛날처럼 뱃사공의 노랫소리는 간 곳 없고, 강변북로 고가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의 행렬만이 분주하지만,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간직하고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필자가 방문한 시기가 사순절(四旬節)이어서 사순절을 알리는 깃발이 여기저기 나부끼고,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어느 여신도는 성모마리아의 두손 사이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강복(降福)을 기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톨릭 신자가 아니더러도 잠두봉 유적은 한강시민공원과 같이 있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둘러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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