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 잠든 고귀한 넋들
글·사진 남상학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혁의 진통을 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람의 터 밭에서 열매 맺은 그 믿음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여라"
-정연희의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봉헌시”의 일부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A. 드디어 쇄국의 빗장이 벗기고
양화진(楊花津)은 마포구 합정동에 있다. 양화진은 지리적으로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송파진과 함께 서울에서 오진(五津)의 주요한 나루터로서 인천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해상 통로의 전진기지로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입지적인 조건 때문에 양화진을 한성을 넘보는 외적들이 쉽게 들이닥칠 수 있는 국방의 취약지로 만들어 구한말 조선과 서구세력의 물리적 충돌을 야기했고, 병인양요를 계기로 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또한 이 같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수륙교통(水陸交通)의 거점기지(據點基地)로 활용되었다. 대원군의 천주교 대박해 이후, 시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한 명성황후와 외척들은 쇄국의 빗장을 벗기고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지각변동을 틈타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복음화를 목표로 제물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권유를 받아 1882년 5월 22일, 구미(歐美)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미국과 국교를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때 한국 측은 신헌(申憲)·김홍집이, 미국 측은 벨트(Robert W. Shufeldt)가 참석하여 제물포 해안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미국 장로교회 선교본부는 1884년 존 헤론(John W. Heron)을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고, 뒤이어 언더우드를 1884년 7월 28일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먼저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는 중국에서 입국한 알렌이다. 언더우드는 헤론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먼저 내한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당시 민영익(閔泳翊)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알렌(H.N. Allen)의 서양 의술 덕분에 선교사들과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고, 이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금교령(禁敎令)으로 인해 복음전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주로 의료와 교육, 자선사업을 통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침투하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의 반기독교적인 정서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개인 전도보다는 사회제도 전반에 걸쳐 간접적인 선교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사가 추후 민족의 역사와 얽혀지는 근거가 되었다.
▲알렌 부부
B.헤론의 죽음과 매장
한편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헤론에 의해 제중원으로 바뀜)의 원장이 된 헤론(J.W.Heron)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33세로 삶을 마감한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왜냐 하면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허드(A. Heard)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1883년)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례를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교섭통성사무 독판 민종묵(閔種黙)과의 급박한 서신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졌다.
이곳 양화진 언덕은 외국 선교사로 내한한 언더우드(元杜友) 밀러(F. S. Miller)목사, 에비슨(Dr. Avison)박사가 이곳의 땅을 미화 75불에 구입하여 각각 그들의 여름 별장을 지은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성서를 번역하고 봉사자들을 접견하였으며, 휴식 시간에는 동네 아이들과 수영도 함께 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한강에서 배를 타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찬송도 부르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존 헤론(John W. Heron)
* 최초의 피장자인 J. W. 헤론(한국명 蕙論, 1856.6.15 - 1890.7.26)
영국에서 출생, 미국으로 이주.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5년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알렌의 후임자로 제중원 운영. 언더우드, 아펜셀라 등과 성서번역위원으로 일함. 선교사 공의회 조직(회장 역임). 문서선교, 농촌 지방 순회 진료 등으로 진료와 전도 활동에 헌신함.
▲존 헤론의 묘
C. 서울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이 조성되기까지
1890년 헤론이 최초로 묻히면서 외교통상부는 이곳을 외국인묘역으로 조성하여 1897년 묘역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주한미국공사관 특명 전권공사 알렌이 묘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 이후 한때는 토지 대장에 소유자가 경성구미인묘지회로 등기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모든 외국인이 강제 출국되자 법적 명의자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중요 직책을 담당했던 언더우드 2세가, 6.25 후에는 미국 민간고문단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온 언더우드 2세와 3세가 경성구미인묘지회 대표로 등기했던 것을 외국인토지등기법으로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고, 서울시는 서울 지하철 공사로 묘지를 이전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경성구미인묘지회는 1985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 묘지소유권을 이전하여, 불평등조약 95년만에 원산을 회복하였고,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쓰레기와 잡초만 무성하여 청소년 우범지대였던 이곳을 정화하고 연고무덤을 찾아 쓰러진 비석을 바로 세워 명실공히 묘지공원으로 가꿨다.
이어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기독실업인의 헌금으로 선교 100년을 기념하고 묘지를 관리하기 위한 선교문화센터로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이곳을 예배처로 쓰던 유니온교회로 하여금 묘지를 관리하도록 하였고, 묘지의 명칭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변경하였다.
그 후 마포구청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2001년부터 양화진성지공원화 사업을 추진하여 2003년 공원조성을 완료하였고,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는 2005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창립하여 양화진 묘역과 선교기념관 관리운영에 대한 일체의 책임과 권한을 100주년 기념교회에 위임하게 되었다.
D.이역(異域)의 하늘 아래 잠든 넋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는 분들은 누구이며, 어떤 일들을 한 분이기 이역의 하늘 아래 잠든 것인가? 이 땅에 와서 젊음을 바쳐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풍토병과 과로로 숨진 선교사들, 은퇴 후 고국으로 돌아가 죽은 뒤에도 육신은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이들, 함께 한국에 왔다가 배우자를 먼저 이 땅에 묻고 홀로 사명을 다한 뒤에 합장된 사람들, 고국에서 태어났더러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어린 자녀들, 양화진 묘지공원에는 수많은 외국 형제자매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은 모두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던 이국땅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들었던 선각자들이었다. 현재 선교사와 가족의 무덤수가 16개국 206기를 포함하여 전체 무덤 수는 555기에 달한다. 이들을 국가별로 보면 미국 279기, 영국 31기, 캐나다 19기, 한국 19기, 러시아 18기, 프랑스 7기, 필리핀 5기, 독일, 스웨덴 각 4기, 이탈리아, 덴마크 일본 각 2기, 호주, 남아공, 폴란드, 뉴질랜드 각 1명, 그 외에 159기는 국적 불명(미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은 제1묘역, 제2묘역,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 중 몇 사람을 소개하면,
* E. T. 베델(한국명 裵說, 1872-1909)
영국 브리스톨 출생. 1904년 <런던 데일리뉴스> 특파원으로 내한. 1904년 한국 상황에 동정하여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과 사재를 털어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장에 취임. 일본의 침략 비난. 일제의 폭력으로 신문사를 빼앗김
* 언더우드(Underwood) 가족묘역
이 곳에는 3대(원두우, 원한경, 원일한)에 걸쳐 모두 일곱 분이 묻혀 있다. 1대인 언더우드 1세가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1885년부터 언더우드 3세(元一漢)가 세상을 떠난 2004년까지 120년의 기간은 그대로 한국개신교 120년의 역사이기도 하다.
H. G. 언더우드(Underwood, 한국명 元杜尤,1859-1916)
영국 런던에서 출생하여 뉴욕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미국으로 이민했다. 1885년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광혜원에서 화학, 물리학을 강의 하고, 고아학교인 예수교학당, 경신, 연희를 잇달아 창설했다. 1889년 의료선교사 홀튼(Lillias Stirling)와 결혼한 후 1897년 새문안교회를 창설하고, 1900년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했다. 1913년 조선장로교독노회 총회 회장에 피선되었고1908년부터 대학 설립을 계획하여 1915년 연희전문학교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원두우의 아들인 H. H. Underwood(元漢慶, 1890-1951)은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여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 심리학을 전공하고 1912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협성신학교교장을 역임하고, 1934년 제3대 연희점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나 1942년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간제 귀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45년 미 육군성 통역으로 다시 내한연희대학교에 복귀하고 경신, 정신, 대광학교와 성서공회, 기독교서회 등의 이사를 역임했다. 한국전쟁 시에는 미국 민간고문 자격으로 부산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과로로 소천하였다.
원한경의 아들인 H. G. Underwood(元一漢, 1917-2004)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39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연희대학교에 부임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 해군의 해병사단정보부에서 근무하였고, 1954년부터 연합장로회 선교사로서 전도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78년 교수직에서 은퇴 후 연세대학교 상임 이사로 봉직했다.
* H. G. 아펜젤러(Appenzeller, 한국명 亞扁薛羅, 1858-1902)
양화진에는 한국 선교 초기의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라가(家)의 무덤이 있다. H. G. 아펜젤라와 그의 장녀인 A. R. 아펜젤라, 그리고 장남인 H. D. 아펜젤라 등 그의 세 자녀가 모두 한국 선교사로 헌신, 유지를 받들었다.
H. G. 아펜젤러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 출생. 웨스트체스터 사범학교, 프랭클린앤드마샬 대학, 드루신학교 졸업. 1885년 미국 감리교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도착. 서울로 들어와 전도, 교리서 번역, 배재학당 설립.1887년 벧엘예배당 설립, 첫 공중예배(정동제일교회). 1887년 한국성서위원회 서기로 성서사업 업무 관장. 삼문출판사, 조선성교서회 창설, 회장 역임. 1897년 엡윗청년회 조직, YMCA 운동을 주도해 청년운동에 공헌함. 1897년 순한글 조선신문 <조선크리스토인회보> 창간. 1902년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한해 중 침몰사고로 소천.
H. G. 아펜젤라의 장녀인 A. R. 아펜젤라(1885-1950)는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주 웨슬리아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5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한 뒤 1921년에는 제6대 이화학당장, 1925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어 193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김환란이 취임했다. 한때 귀국하여 본국에서 대학 간의와 하와이 선교사업에 종사하다가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2월 20일, 설교 도중 뇌일혈로 소천했다.
아들인 H. D. 아펜젤라(1889-1953)는 역시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여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수학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드루 신학교,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3년간 인천지방 선교 사업에 종사했고, 1920-1940년 배재학교 4대 교장으로 근무했고, 한국 전쟁 시에는 기독교 세계구제회 한국 책임자가 되었고, 1952년에는 배재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 M. F. 스크랜턴(Scranton, 1932-1909)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 출생. 1855년 W. T 스크랜턴과 결혼 후 1872년 남편 사별. 1885년 미감리교 여선교사로 최초로 내한. 정동에서 여성교육 사업 시작. 1886년 5월 31일 이화학당 창설. 1898년 여선교회 조직, 여성순화선교반을 창설하여 전도활동에 전념하며 아들과 함께 평생을 한국 선교에 헌신함. 1909년 10월 8일 은퇴 후 77세로 한국에서 소천. 아들은 W. B. 스크랜턴.
W. M. 베어드(Baird, 한국명 裵偉良, 1862-1931)
미국 인디애나 주 찰스턴에서 출생하여 하노버 대학과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히브리대학,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1891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경상도와 대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897년에는 평양지구 선교회로 이전하여 사랑방학교를 개설하여 1901년 숭실대학의 전신인 숭실학당의 당장(堂長)에 취임하여 대학으로 발전시키고 학장을 맡았다. 1916년 학장직을 사임한 후에는 주일학교 공과교재를 번역하여 발간하고, 기독교서회, 성서공회 위원으로 성서 번역과 문서사업에 전념하였다.
* R. S. 홀(Hall. 한국명 許乙, 1865-1951)과 그의 아들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
미국 뉴욕 주 설리반카운티 출생. 펜실베이니아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뉴욕 빈민가에서 자원의료봉사 중 홀을 만나 결혼한 뒤 1890년 미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하워드의 후임으로 진료활동을 시작하였다. 1892년 홀과 결혼하고 보구여관에서 간호원 양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4년 남편이 평양에 병원으로 설립하자 평양으로 옮겼다.
그 해 청일전쟁 부상병 치료중 남편이 전염병으로 죽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내한하여 1898년에 평양으로 파송 받아 광혜여원을 설립, 부녀자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17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동대문 부인병원 의사로서 한국인 여자 의사를 양성하고 해주 구세요양원 내에 로제타기념예배당을 건립했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유니온대학을 졸업하고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20년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항하여 해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특히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국 최초롤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였다.
E. 감동 깊은 비문들
이른 봄 오후 묘지공원은 한적했다. 몇 사람만이 공원 묘역을 둘러볼 뿐 인적이 드물고 산새들만이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들며 지저귄다. 묘지에 세운 비문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한국을 사랑하는 내용으로 요약되어 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낯선 땅 이곳에 와서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을까. 무엇이 이들을 낯선 땅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을 갖게 했을까? 그것은 부르심과 소명이었다.
이곳에 묻힌 분들 가운데는 일제 암흑기 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했던 약 210명 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은 전도양양한 젊은이들로 모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수많은 권리들을 포기하고, 당시 세상에서 가장 미개한 나라, 덜 알려졌던 나라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서 헌신했다. 묘지에 세운 비문들을 읽다 보면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아펜젤라의 인천에 상륙하여 드린 첫 기도, 본국 선교부에 보낸 첫 보고서의 한 내용이기도 함)
•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J. W. 헤론)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 B. 헐버트)
•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 "찬목사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W. V. 존슨)
•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 K. 젠센)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R. 켄드릭)
이들은 미개한 이 땅을 찾아와서 지고의 진리로 여기는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고,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같은 사회제도에서 뿐만 아니라, 신분제와 남존여비 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세계에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무단강점을 한민족과 같이 아파하였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였다. 이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교활동을 하러 온 수많은 외국인들은 중국에서 배를 타고 물살에 몸을 맡긴 체 한강의 양화진에 도착하였다. 이제 세월을 뛰어 넘어 그들의 몸은 비록 여기 말없이 묻혀 있으나, 그들의 이 땅을 위한 기도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낯선 땅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을 갖게 했을까? 그것은 부르심과 소명이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부름을 받고 어떤 묘비명을 준비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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