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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안성 미리내성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 순례의 길'

by 혜강(惠江) 2006. 3. 29.

 

안성 미리내성지

 

고난주간에 가 보는, 달빛 아래 은하수 미리내성지

-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 순례의 길' -

            

 

글·사진 남상학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라라'   
(요한 12: 24-25) 



 

 

 

   이틀 동안 몸을 옴츠리게 했던 꽃샘추위가 가시고 날씨가 화창하여 나들이에 적합한 날씨다. 성회수요일인 2월 9일부터 시작된 사순절에 이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며 사랑의 발자국을 내딛으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에 접어들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미리내 성지를 찾아갔다. 이곳은 천주교의 최대 성지로 손꼽히는 곳으로  예수가 로마병사에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다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이 청동조각상으로 서 있으며,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기에 안성맞춤인 겟세마네 동산이 재현되어 있는 곳이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아온 ‘좋은벗님네’ 일행과 함께 분당을 거쳐 미리내 성지로 향했다.  꽃샘추위가 가신 시골 들녘은 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있는 미리내 성지(031-674-1251)에 당도하니 입구에 세워놓은 거대한 표지석이 미리내 성지임을 알려준다.

 

 

 

 


    우리나라의 초기 천주교의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순교의 역사이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최대 성지로 손꼽히는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종교탄압 속에서도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 들어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성지에 들어서면 고요하면서도 편안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성지를 둘러보면 가슴이 깨끗해짐은 느낄 수 있다.  

 

  이곳이 미리내로 불리게 된 것은 천주교신자들이 두 번에 걸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하였는데, 밤이면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고, 이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1972년부터 성역화 작업이 시작됐다. 한국 천주교 성인 103위 성전, 김대건 신부의 묘(墓)와 경당, 사제관, 수도원, 겟세마네 동산을 재현한 순례의 길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성지에 들어서면 웅장한 기념 대성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본당으로 승격되었을 때에는 이곳에 이미 1천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하나 이제는 많이 떠났으나, 1990년 여름 교황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성지로서의 면모가 더욱 뚜렷해졌다. 

 

 



   성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모르고 찾아온 나는 입구에 있는 성지설명과 안내도를 살펴보고 먼저 오른쪽 언덕 위로 올랐다.  성당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미리내 성지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신앙 선조들의 순교 선열을 기리는 거룩한 곳으로 기도하는 장소이니 경건한 신심과 자세로 순례에 임해 달라’는 주의사항에 눈길을 끈다. 성당을 거쳐 오른쪽 언덕 숲길에 조성되어 있는 겟세마네 언덕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겟세마네 언덕은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의 크고 널찍한 바위들로 덮여 있고, 키 큰 낙엽송들이 하늘을 덮은 울창한 숲으로 이어진 언덕이었다. 20~30도 경사를 오르는 산책길 옆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고난에 이르는 행적들을 알려주는 상징물들을 시간적으로 나열하여 그리스도의 행적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나는 이 길을 오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오늘‘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길은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분이 이 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그 길이 참기 힘든 고난과 말할 수 없는 굴욕의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길이라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잃고 견디기 힘든 순간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기에 참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언덕 정상에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는 예수와 그와 반대로 바위언덕에 엎드려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세 제자가 실물 크기로 조각된 모습이 보였고, 문득 예수께서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하셨던 애절한‘겟세마네의 기도’가 떠올랐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태 26:38)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   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주께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곳, 이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꺾고 아버지의 뜻을 세우려고 용기와 능력을 구하는 중대한 시간,  그 시간조차 깨어있지 못하고 엎드려 깊은 잠에 빠진 제자들처럼 나 역시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십자가를 지고 우뚝 서신 주님 앞에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꾸짖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0-41)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성모통고(痛苦)의 집’을 거쳐 오른쪽 등성이에 있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원, 또 그 위편에 있는 18위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를 보고 내려왔다. 
성지의 중신 건물인 기념 성당으로 향하는 넓은 길은 길의 양 옆으로 베들레헴 말구유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행적을 알리는 조형 구조물들이 있고, 미리내 성당(순교자의 모후께 봉헌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으로 오르는 기념성당 뒤쪽으로 난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가 로마병사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받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져 있는 청동조각 15점이 서 있다.  조각상 앞을 지날 때마다 그 과정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가르친 진리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다.'

 (1) 당당하게 체포당하신 예수님(마 26:47-56, 요한 18:1-17)
 (2) 유대 지도자들 앞에 서신 예수님(마 26:57-68, 요한 18:12-27)
 (3)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마 27:11- 23, 요한 18:28-38상)
 (4) 빌라도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마 27:24-26, 요한 18하-19:16)
 (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마 27:32-44, 요한 19:17-27)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한 19:26)
    -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6) 예수의 죽으심(마 27:45-50, 요한 19:28-30)
    - 내가 목마르다(요한 19:28) 
    - 다 이루었다(요한 19:30)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 46)

 (7)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심(요한 19:31-37)
 (8) 장사 지냄(마 27:57-61, 요한 19:38-42)

 (9) 예수의 무덤을 지킴(마 27: 62-66)
 (10) 사흘 만에 부활하심(마 28:1-10, 요한 20:1-10)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의 사투 끝에 예수는 운명하신 것이다. 그의 죽음의 사건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이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지엄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며,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라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사랑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절망을 소망과 환희로, 불안을 용기와 평안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돌려놓은 역사의 대반전을 이루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돕기를 원했다. 그는 그의 시대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람들의 삶에 혁명을 일으키셨다. 비록 유대인들이 기대한 꼭 그런 종류의 왕은 아니었지만 예수는 바로 왕이 되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4-5)


   그렇다.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우리는 그릇된 길로 갔고,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순간 어디선가 "비아돌도로사"의 찬양이 들리는 듯하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건 중심에 서서, 그 고난의 사실 앞에 엎드려 자신을 주께 복종시키는 의미 있는 절기라 할 것이다.  청동상을 배치한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새기려는 신도들의 순례의 코스가 된다.  신도들과 수녀 등 순례자들이 줄을 지어 경건하게 참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하는 수녀들

 

 

    청동 조각상을 따라 오르면, 새로 지은 대성전 뒤로 김대건 신부의 무덤과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는 미리내 성당을 만난다. 이곳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우르술라, 김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 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상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2~1846, 순조22 ~ 헌종12)은 교명 안드레로 천주교 성인의 한분이다. 충청남도 내포에서 독실 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 와서 살았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모 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 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 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 국어를 익혔다.  한때 통역관으로 있었으나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의 일생은 짧았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그는 그러나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이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보다 큰 재앙" 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6일엔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처형된다.   당시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그러다가 40일이 지난 다음에 이민식 빈 체시오가 간신히 시신을 빼내어 남의 눈을 피해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눌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르눌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미리내 성당 앞 묘소에 참배하고 돌아내려오면 김대건 신부의 동상, 모자이크가 아름다운 성모성당이 있고,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전(천주 성삼께 봉헌한 한국 순교자 백삼위 시성 기념성전)을 만난다. 김대건 신부와 40여명의 순교자가 묻힌 이곳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103위성인 기념대성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1990년 여름 교황의 방한을 앞둔 때였다.  

    정문 앞에는 미사시간을 알리는 안내표가 붙어 있다. 성전으로 들어가면 고해성사실과 본당인데. 본당 전면에는 다섯줄로 된 스테인그라스 창문이 있어 자연 채광을 반짝이고 천정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면 천주교 박해 시절 신도들을 고문하던 갖가지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미리내 성지는 개신교 신자인 나에게도 큰 깨우침의 장소였다. 3·1절에는 화성에 있는 제암리 교회나 병천에 있는 유관순 기념관이 좋다. 하지만 사순절 절기, 특히 고난 주간을 맞아 돌아보기 좋은 순례의 강소로 이곳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또 신자가 아니더라도 깨끗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맛보려는 사람들은 한번쯤 방문해 보는 것이 좋을 듯.     
 

<교통정보>

   (1) 영동고속도로 용인 IC 에서 용인 시내로 빠져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11km 가면 송전리이다. 여기서 이동저수지를 끼고 4.8km쯤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2.5km쯤 가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미리내 입구이다. 
   (2) 경부고속도로 이용하여 오산 인터체인지로 나와 82번 도로를 타고 용인 방면으로 진행하여 장지를 거쳐 송전 삼거리에서 우회전, 난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고, 노곡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미산저수지 옆을 지나면 미리내 성지에 닿는다.  

<주변관광지> 
편운재 문학관, 미리내 농촌테마마을, 예지촌 등. 미리내성지의 주변에는 고삼저수지를 비롯해, 노곡저수지ㆍ이동저수지ㆍ미산저수지 등이 강태공의 발길을 유혹하고 저수지 주변으로 깔끔한 식당들이 있어 휴식과 식사를 취할 수 있으며, 서울에서 불과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가벼운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적합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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