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순교의 피 얼룩진 오천 갈매못 성지

by 혜강(惠江) 2008. 5. 9.

 

보령 오천 갈매못 성지

 

순교의 피로 얼룩진 순교의 땅

 

 

글·사진 남상학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갈매못. 행정 구역으로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번지 '갈매못'. 이곳이 한국 가톨릭 최고의 순교 성지로 꼽는 곳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렀던 곳이다. 따라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갈매못은 이름마저도 영적인 곳이다. 이제는 목마른 말이 아니라 지친 현대인에게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하는 생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갈매못 순교성지 안내도

 

 

 

  오천은 지금은 찾는 이 많지 않은 한적한 어촌이지만 조선시대엔 국방과 치안을 담당했던 '수영(水營)'이 있었고 수군통제사가 근무했다. 당시 수영의 군인들이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이 갈매못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의 한 획을 그은 다섯 성인들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오천성과 진휼청 등 유적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처참했던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땅이다. 극심하던 병인년(丙寅年) 대박해 때에 신자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스스로 자수하여 체포된 세 분의 프랑스 성직자와 당시 교회의 중추인물이었던 한국인 두 분이 1866년 3월 30일 처형을 당한 곳,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피가 젖어 있는 처형장이 갈매못 성지였다.
   
   샤를르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의 처형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박해시대에 천주교와 관련된 중요 인물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되곤 했으나 갈매못 땅에서 순교한 다섯 분은 당시 고종황제의 혼례식을 앞두고 있어 한양에서의 사형집행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충청수영이 있던 이 멀고 먼 오천성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주인공인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성 황석두 루가 회장, 성 장주기 요셉 회장". 세 분 프랑스인 주교와 신부는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8천명이 넘게 죽임을 당한 병인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이 잡혀가면 많은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구할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기꺼이 자수하여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 밑에서 회장으로 일했던 황석두 루카 또한 자신만 살 수 없다 하여 주교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사형장으로 따라 나섰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신학당을 운영하다 붙잡혀 한양에서 옥살이하며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장주기 요셉 회장 또한 형장으로 향하던 다른 네 분과 함께 순교하기를 자원하여 1866년 성 금요일 이 곳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주님을 부인하여 짧은 배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신앙을 증거하며 죽어 영원한 천상낙원을 원했던 다섯 분 성인의 넋이 기린 곳이 바로 이 갈매못이다.  

 

 

 

주님, 핍박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 불쌍한 형제들의 원을 들어주소서.
저들은 당신의 사랑을 원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이땅은 지금 당신을 알고,
당신 말씀을 따르기에는 너무 벅찬 고난의 시기이옵니다.
핍박과 환란이 오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박해를 피해 집을 버리고,
논과 땅도 버리고 산으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당신을 찾고 있사옵니다.
고통 속에서도 당신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그들에게 빛을 주소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과 함께 님을 알기에 충분한 신덕을 주소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성 안 주교님이 바치신 기도 중의 하나 



   이곳은 오랜 동안의 고증과 증인들을 통하여 치명터를 확인한 1925년부터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하였고, 1975년 순교비가 세워졌으며, 1999년 9월 16일 아담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그리고 강당이 완공되어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바다 쪽 앞마당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마련하여 주님의 고통과 순교자의 넋을 묵상하며 성지 안을 자연스레 돌아볼 수 있게 조성해 놓았다.  마당 한가운데 육지에 둘러 싸여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잔잔한 바다를 등에 지고 예수 성심상이 팔을 벌려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그 옆으로 다섯 분이 처형을 당한 20평 남짓 순교의 땅 위에 순교 복자비와 순교 성인비가 세워져 있다. 

 

 



  죽임을 당하면서도 기꺼이 미소 지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신앙의 땅, 이제 피 흘림의 흔적은 사라지고 푸른 잔디가 덮여 뒤로 펼쳐진 바다와 함께 평화로움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노을이 질 무렵 타는 바다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석양 노을에 순교의 피가 살아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2008년 3월 성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문을 연 기념관 입구에는 야외제대 양 옆으로 성 다블뤼 주교상과 황석두(루까)상의 조각이 서있다.   그리고 기념관 안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중백의와 저서, 친필 서명을 비롯해 성 오매트로 베드로 신부의 제병기, 다블뤼 주교가 머물던 신리공소 주교관 주춧돌, 교회사 편찬을 위해 집필하는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의 모습 모형, 순교화(殉敎畵) 등이 전시돼 있다. 

 

 



   아울러 내부에는 30여 석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순례객들이 유물을 관람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기념관 스테인드글라스는 순교의 피를 상징하듯 강한 인상을 던져준다.

  그리고 기념관 옆으로 난 길을 오르면 승리의 성모성당이 언덕 위에 높이 서 있다. 병인박해 140주년을 기념해 2006년 10월에 완공, 봉헌한 새 성당은 건축면적 140평 규모로 220여명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성당으로 다블뤼 주교 등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된 유해공경실, 성체조배실 등을 갖추고 있다.

  성당을 오르는 길에 놓인 청동 십자가의 길 위로는 성당 주출입문 바깥까지 돌계단을 만들어 500여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성당 안팎에서 동시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성당 외벽은 지역 특산물인 보령 오석(烏石)으로 내구성을 높였으며, 성당 외부를 울창한 숲과 화단, 산책로로 꾸며 자연친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조개껍질 모양의 성당 지붕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순교자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지를 통해 순례자들이 교회의 진주로 거듭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당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는 산 속에 숨은 신자들이 나무 사이로 성인들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을 그려 눈길을 끈다. 미닫이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좌우로 옮기면 성당에서 성지 앞 서해 전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

 
1)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나들목->천북면 하만리->40번국도-> 보령호방조제->오천성-> 갈매못성지
2)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나들목->광천읍내->보령 방면 21번국도->청소면 진죽리-> 장
곡리 -> 오천성 -> 갈매못성지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