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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를 키워낸 신앙의 못자리

by 혜강(惠江) 2007. 4. 12.

 

당진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를 키워낸 신앙의 못자리 

 

·사진 남상학


 

 

 

 

  대천으로 가는 길에 어딘가 들러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이 솔뫼성지였다.  마침 고난주간이어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탄생지인  솔뫼 성지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조부(김택현)를 따라 용인 골배 마실로 이사 가기 전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김진후. 1814년 순교), 종조부(김한현. l816년 순교), 부친(김제준. 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에 걸친 순교자들이 살던 곳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솔뫼는 한국 천주교사(韓國天主敎史)에서 신앙의 못자리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는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 곧 송산(松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10대 선조인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하면서 가문이 내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9대 선조인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내며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이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 선조인 김수완 때부터 가문은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경 김대건 신부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하여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김 신부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1821년 8월 21일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과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주교 신자인 집안이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현 골배 마실)으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다.  뿐만아니라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1846년 순교)에 이르기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0세 전후인 1830년경에 솔뫼를 떠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1836년에 세례를 받고,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그 후 1845년에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1846년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그의 무덤은 미리내성지에 있다.

   ‘솔뫼성지’라고 새긴 돌탑이 세워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회색 정문을 들어서자 바로 왼쪽으로 대나무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였다. 이 생가는 2004년 9월 22일 복원하고 축성식을 갖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1827-1830년 사이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이 박해와 흉년을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솔뫼를 떠날 때까지 당시 김씨 일가가 살던 집은 99칸이나 되는 큰집이었다고 한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가문이었지만 증조부(김진후)가 15년간이나 옥중 생활을 한 까닭에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도 어려웠다. 작은 종조부 김한현(金漢鉉)도 증조부가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고, 조부 김택현(金澤鉉)은 1827년에 아들 제준과 손자 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한덕동(현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를 갔다. 

 

 

 


   그 후 김대건 신부님의 솔뫼 생가는 돌보는 이 없이 폐허가 되어가다가 기근에 떠돌던 외지인들이 정착하여 그 집을 허물고 초가를 짓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는데, 그 집터가 과거에 내포에서 부유했던 김대건 신부의 생가지라는 사실이 내포 신자들에 의해 구전되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교회 전승과 순교자 증언록에 근거하여 1906년에 토지 매입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합덕본당 크렘프 신부가 솔뫼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지를 확보하려했으나 정착인들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생가지 인접 논을 매입하여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5년에 백 페랭 신부가 솔뫼 성지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는 곳 일부를 매입하여 솔뫼 성지 개발의 초석을 놓았고, 6.25사변이 끝나면서부터 합덕본당 박노열 신부는 매년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여 오늘의 한국 성지순례 신심을 정착시키고 있었다. l그러다가 1906년부터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백 빌리버 신부가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1977년 국가의 지원으로 김대건 신부 생가지를 확보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그 후 수차례 생가복원 사업계획을 수립했으나 실천하지 못하다가 1998년 생가지를 충청남도가 지정문화제 제146호로 지정하면서 지자체 지원과 고증을 받고 김대건 신부 생가지에 2004년에는 생가 안채를 복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말끔하게 자리잡은 생가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첫째로 오랫동안 뼈와 신앙을 키우며 살아왔던 집을 놓아두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얼마나 서럽고 억울했을까 하는 것과 둘째는 선대의 순교신앙의 전통을 선양하기 위하여 생가를 복원하기까지 기울인 신앙인들의 노고가 근 일을 이루고야 말았다는 부듯함이다. 생가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입상(立像)과 생가복원비, 장독대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고, 생가 마루 위에는 뒤주 위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액자가 걸려 있다. 

 

  생가에서 나와 왼쪽으로 계단을 올라 솔밭 끝에 우뚝 서 있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로처럼 꼬불꼬불 만들어진 숲길을 걸으면서 소나무 동산에서 뛰놀았을 소년 김대건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갔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초창기 한국 천주교가 새싹을 움틔웠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동상 앞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성지순례차 이곳을 찾아온 무리들이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3미터 높이의 이 청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왼쪽 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탑을 세웠다.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멋스럽게 가지를 뻗고 있다. 마치 신앙을 지키고자 절조를 지킨 의연함으로. 이 동상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은 1946년에야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건립되었다. 

 

 


  
동상 앞에서 오르던 길을 다시 내려오면 1983년에 완공된 ‘피정의 집’ 이 있다.  피정의 집 성당 안에는 김 신부의 영정과 유해가 모셔져 있기도 하다. 정원 모서리에 서 있는 성모상은 순례자를 정겨운 시선으로 맞는다. 솔뫼의 성모상은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미터 크기의 상이다.    

  
피정의 집 앞에서 뜰의 뒤쪽에는 김대건신부기념관이 서 있다. 기념관 앞으로 난 소로(小路)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여 명상하도록 하였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조롱당하고, 사형당한 뒤, 부활하기까지 과정을 15개 그림(모자이크)으로 장식하여 소로를 따라 명상하도록 만든 것이다. 명상하는 기도처를 하나둘 스쳐 지나가는 동안 가슴이 뭉클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이사야 53 :5)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 부활의 소망을 이루듯,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으나, 순교자 김대건 신부는 1925년에 교황 비오11세에 의하여 복자품에 올랐고, 1949년에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해졌으며,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그 순교의 피는 열매로 꽃피워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는 피값으로 무수한 교회들이 세워졌다.   

   2005년에는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대전교구가 힘을 모아 2005년에 김대건 신부의 뜻 깊은 신앙과 성덕, 그리고 사상과 행적을 기념하고 기리며 전하기 위하여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을 이루었다.

 

◆여행정보

 

* 입장료 : 어른-2,500원/(단체30인) 2,000원, 초중고학생-2,000원 / 단체1,500원
* 교통안내 (1) 서울->천안I.C->온양->아산(도고온천)->신례원->합덕->솔뫼성지  (133.7 km, 2    시간 소요)
 (2) 서해안고속도로->당진I.C->합덕->솔뫼
* 현지교통 : 합덕 ~ 솔뫼 거리 1k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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