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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성지순례(국내)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감리교 초대선교사 순교의 얼을 찾아

by 혜강(惠江) 2008. 6. 20.

군산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아펜젤러, 그 순교의 얼을 찾아 군산으로  

글·사진 남상학 

 

 

 

- 아펜젤러, 그는 ‘한국을 자유와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썩어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 

 

 

 

▲ 군산에 세워진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와 기념관 

 

▲기념관 벽에 새긴 아펜젤러 순교 추모시

 

 

“아무도 밟지 않은 툭 트인 바다 밑 묘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무덤 속에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잠들어 있다. 그는 그의 품에 영혼을 안고 천국에 들어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놀라게 한 것은 큰 소리나 대포의 연기가 아니며,

폭풍 위의 거친 숨결도 천둥도 아니다. 다만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 그리스도의 목소리 뿐”

 

 '아펜젤러 순교 추모시' 중 일부

 

 

  2008년도 꽃재교회(구 왕십리감리교회) 장로부부수련회 장소로 초대 개신교선교사이며, 현대교육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로 정하고 우리 일행은 김성철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지난 6월 6일(금) 군산으로 향했다. 그 순교의 정신을 배우고자 함이었다.

 

  순교기념교회를 섬기는 임춘희 목사님의 개회설교는 성전 건축을 앞둔 우리에게 큰 도전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 밤늦도록 교회건축에 관한 안건을 주제로 진지하게 토론한 뒤 이어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기도회는 김성철 목사님으로부터 성전건축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2007년 6월 11일,  초대 개신교 선교사로 1885년 4월 한국에 들어와 17년간 복음을 전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를 기념하는 교회가 전북 군산시 내초도에 세워졌다. 내초도 온누리교회는 온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 감리회본부와 지역 25개 교회의 후원을 얻어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임춘희 담임목사)와 기념관을  완공하고 아펜젤러 순교 105주년에 맞춰 입당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개신교사(감리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기념적인 성지를 마련한 것이다.  

 

1. 아펜젤러(Appenzeller; 1858. 2.6 ~ 1902. 6. 11)의 삶

(1) 성장배경, 한국입국

 

 

* 최초의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

▲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조선의 예복을 갖춰 입은 모습. 조선일보DB사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에서 1858. 2. 6일 출생. 부친은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개혁교회 교인이었고, 모친도 독일인이었으며 어려서부터 가정의 독실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지방의 사범대학에서 수학하던 때 그곳 장로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회심의 체험을 했는데 그는 이날(1876. 10. 6)을 제2의 생일로 기념하기도 했다. 그 후 랭카스터에 있는 프랭클린 앤드 마샬 대학에 진학하여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 어학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회심 이후, 개혁교회나 장로교회의 신앙유형에 갈등을 가지고 있던 중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 기도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감리교인이 되었다. 그는 1882년 드루신학교에 진학하면서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884년 12월에 청교도 후예인 닷지와 결혼하고 1885년 2월에 파울러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아 드디어 27세의 나이에 조선 선교사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일본에서 이미 조선의 마케도니아사람으로 불리는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과 풍속을 배우기도 하였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 성경을 몸에 지니고 은둔의 땅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첫발을 들여놓았다. 입국 당시 그 나라말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 주요활동과 업적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들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라(27세) 부부는 1885년 4월 5일, 26세 미혼의 언더우드와 함께 은둔의 땅 조선국 제물포항에 선교사로서 나란히 첫발을 디뎠다. 기록에 의하면, 27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입국하여 두 가지 큰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외세의 이권 탈취와 침략, 또 하나는 관리들의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억압에 대하여 참을 수가 없어서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 귀국한 서재필과 손잡고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내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벌였으며 독립협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민중의 의식개혁운동을 장려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사건으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투옥되었을 때 옥중으로 방문 전도하여 이상재, 이승만, 유성춘,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김린, 이원긍, 남궁억 등이 기독교인이 되는 동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집중적으로 전개한 일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1885년 8월 3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썼으며, 둘째는 출판문화 사업을 통하여 그동안 지식계급에 의하여 무시되거나 천시되었던 한글을 발굴하고 보급시키는데 앞장을 섰고, 월간지를 간행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렸으며, 셋째는 1887년 10월 9일 정동제일교회의 전신인 벧엘예배당을 최초 세웠고(이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가 되었다.), 넷째는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한글로 창간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민족계몽 함께 복음 선교의 내용을 전하였다. 그리고 성서번역은 당시 한문 위주의 사회에서 한글 보급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다섯째는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모이는 연합교회를 설립하였고 오늘의 기독교서회 전신인 조선야소교서회도 창립하였으며, YMCA 창립의 산파역할도 하였다.

  그는 17년간 성서번역, 학교설립, 신학교육, 교회개척 등 우리나라 감리교회의 초석을 다졌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설립(1895)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는 모든 분야에 걸쳐 장로교와의 연합 사업에 늘 앞장섰다. 그러나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일은 그의 이타적 죽음이었다.

1858. 2. 6.      미 펜실베니아주 서더튼 출생, 루터교 부모 
1876. 10. 1     영적 생일-매년 기념함 
1877.               웨스터체스터 주립사범학교 졸업 
1879. 4. 20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등록 
1882.               프랭클린 마샬대학졸업
1884. 12. 17    E. J.Dodge 양과결혼 
1884. 12말      한국선교사로 임명 
1885. 1.           Drew 신학교 졸업 
1887. 3.14      배재학당 현판식 
1887. 12. 25   첫한국어 설교  
1888.               가을 배제제본소(삼문출판사)  
1889. 5.          [교회] 발간 
1890. 1.          종로서점설치 
1890. 6. 25.    대한성교서회 회장 피선   
1892. 1.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 발간,
1895.               Korean Repository 속간(~1898까지) 
1895. 9. 9.      정동제일교회 정초식 
1897. 2. 6.      독립협회창설,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창간,편집인 
1898. 12.        감옥에 있는 이승만을 도와줌 
1900. 9. 9.      신약전서 출판기념예배 
1902. 5.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 
1902. 6. 11.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앞바다에서 선박충돌 사고로 하나님의 부름받음  



(3) 그의 죽음과 순교 기념비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서 양화진 선교사묘지공원에 세운 추모비(상)와 

기독교 대한감리회 충청연회에서 2006년 6월 충남 서천 마량진에 세운 추모비 *
 
 

   1902년 6월 11일 밤, 그는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차 인천에서 목포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순직하였다.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타고 가던 증기선 구마가와마루(木曾川丸)호가 군산 앞바다에서 일본상선과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발생했다.  


  이 황급한 상황에서 아펜젤러는 수영에 능했고, 또 탈출이 용이한 1등석에 승선하였으므로 배위로 올라와 충분히 구조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시 3등실 선실로 내려갔다. 3등실에는 함께 승선하여 목포까지 동행하던 한국인 조수 조한규와 목포가 고향인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배는 파선되고 그는 승객 23명과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됐다.

  아펜젤러의 최후의 행적은 같은 배에 동승하여 사고를 직접 목격한 생존자 보울비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동료와 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서 그들을 찾아 헤매다가 정작 자신은 구조 받을 기회조차 놓치고 순교한 것이다.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값진 희생이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15:12)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44세의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으나 조선선교의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떠난 큰 별과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교단은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순교정신을 높이려는 일에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다. 다만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이하여 1935년 정동제일교회에 그의 기념비를 세우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서 양화진 선교사묘지공원 그의 아들의 묘지 옆에 추모비를 건립한 것과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04주년을 기념해 기독교 대한감리회 충청연회에서 2006년 6월 한국최초의 성경전래지인 서천 마량진에 그의 추모비를 제막한 것이 고작이었다.  

  양화진 추모비 옆에는 아펜젤러의 아들이며 미국에서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 교장과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한 헨리 닫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1889~1953) 선교사 묘(墓)가 있고, 이곳에서 동쪽에는 한국에서 백인 선교사의 첫 자녀로 출생하여 미국에서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 제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세계적 종합대학의 기반을 구축한 H. G.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가 안장되어 있다. 검은 색 묘비의 상단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고 하는 교훈적인 글이 새겨져 있다. 그의 가족의 한국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2.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와 교인들의 헌신이 열매 맺다.

 

 

   그러나 감리교는 그의 사후 100여년이 지나도록 초대선교사 아펜젤러에 대한 업적 평가와 함께 그의 뜻을 기리려는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못했다. 여명기 조선땅에 들어와 신식학교(배재학교 이화학당)를 세우고, 교회(정동교회)를 지어 어린 양들을 돌보다 1902년 고군산열도 어청도에서 해상사고로 희생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리는 추모비나 예배처소는 그동안 인근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와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펜젤러 순교의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회하는 한 젊은 감리교 교역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 온누리교회 임춘희목사님(좌), 사모님과 함께(우) 


 

▲아펜젤러 기념관 설립을 결의한  당시 온누리교회 성도들

 


  군산시 내초도에서 온누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임춘희 목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120여년이 지난 지금 5300여 감리교회, 153만 성도로 열매를 맺은 것은 아펜젤러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에 감사하며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일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감리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수많은 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인물을 길러냈고, 수많은 병원과 봉사기관을 세웠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복음의 열매는 결코 우연하게 열린 것은 아니며, 여기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국인을 위해 자신을 삶을 한 알의 밀알로 바친 아펜젤러의 순교자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자주 기억하지 못했고, 우리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임 목사는 어느 날 요한복음 12장 24절~26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늘 읽던 말씀이었지만 새롭게 가슴에 다가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영생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전하라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를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그는 자신의 결심이 인간적인 생각이기 이전에 이미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라 믿었다. “아펜젤러는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두지 않았는가? 그의 숭고한 삶을 기리며 본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젊은 교역자의 가슴에 이 일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일(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아펜젤러 순교를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기념관을 세우리라, 그리고 감리교도들이 찾아와 순교신앙을 다지는 성지가 되도록 하리라.” 120여 년 전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한 아펜젤러선교사의 뜨거운 복음의 열정과 순교정신을 기념하고 그의 믿음을 계승하리라는 의욕이 불끈 솟구쳤다.

  순교현장에서 순교의 정신을 확인하고 그 숭고한 삶을 기리는 것, 그리고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뜨겁게 타오르도록 만드는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순교의 영성을 본받아 교회마다 나아갈 길과 담당할 사명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타국에서 이방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르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개화기 조선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숭고한 넋을 후세들에게 전하도록 기념관을 세우겠습니다.”

   임춘희 목사는 아펜젤러선교사가 평소에 외치던 말처럼 ‘선교는 순교다.’라는 각오로 불과 80여명 밖에 안 되는 교인들을 설득하고 독려하며 함께 열심히 기도했다. 열악한 교회의 교인들은 처음엔 아펜젤라선교사가 누구인지, 몇 번을 들어도 발음이 잘 안 되는 생소한 외국인을 위해 기념관을 세우고 기념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를 위해 엄청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새만금방조제가 축조되는 인근 갯벌에서 조개를 캐며 어렵게 생활하는 처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순수한 교인들은 젊은 교역자의 뜻을 받들기로 하고 합심하여 힘을 모으기로 했다. 우선 교회 앞 새만금방조제로 육지가 된 군산시 내초동 바닷가 땅을 구입하기로 했다. 농사도 안 되는 척박한 간척지였지만, 1080평의 땅을 마치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하여 예비해 놓은 듯이 비교적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부지를 구입하자 온누리교회의 온 성도들은 교회와 기념관을 세우려는 의욕이 더욱 불타올랐다.


  허리띠를 조르고 합심하여 6억 원의 자금을 모으고, 특히 140여 가구 450여명의 주민이 1억 여원의 성금을 거두어 보태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감리회본부와 지역 25개 교회의 후원이 있었지만, 거의 전부 온누리교회 교인들의 헌금이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애당초 기념관을 세우려던 소박한 구상이 순교기념교회 헌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 아펜젤러목사님 순교기념교회 기공예배를 마치고 첫 삽을 뜨다.(2006년 5.18)

 

 

   2006년 5월18일 순교기념교회 기공예배를 드린 후 1년여의 공사 끝에 기도하며 꿈에 그리던 교회와 기념관을 헌당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신경하 감독은 2007년 6월 11일 진행된 입당예배 설교에서 <머릿돌이 된 사람>(시편 118:22-27)이란 제목의 설교는 너무나 감격적인 떨림으로 울렸다.  


▲ 아펜젤러순교기념관 개관식

 

▲전북 군산시 내초도 온누리교회 교우들이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입당 예배를

드린 뒤 교회 마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제공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먼저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 입당을 축하드립니다. 이 교회가 35년 역사 동안 온누리교 회로 존재하다가, 이제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새 성전과 기념관을 입당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123년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제물로 항에 도착한 아펜젤러, 또 105년 전에 군산 앞바다 어청도 인근에서 순직하신 아펜젤러, 그 분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복원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일을 이 교회와 성도님들이 담당하게 된 것을 환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임춘희 목사님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협력하여 귀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였으니, 그 거룩한 수고를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를 이루기까지 수고하신 군산지방 실행위원회와 또 이 교회 건축위원회와 모든 성도님들에게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많은 교회와 순례자들이 이 교회를 다녀가면서, 한국교회 초대교회사를 배우며, 또 순교하신 아펜젤러의 뜻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하 생략)"



  눈물 어린 기도와 땀과 수고가 결실을 맺어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와 기념관은 아펜젤러 순교 105주년에 맞춰 2007년 6월 11일 입당예배를 드렸다. ‘한국을 자유와 그리스도의 빛으로’ 덮고 싶었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수한 꿈이 일백여 년 만에 교회로 다시 피어난 것은 은총이었다.
  도시의 대형 교회들이 지교회의 성장만을 외치면서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를 복원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때, 고군산열도에 속한 내초도의 한 이름 없는 교회(온누리교회)가 기적을 만든 것이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것은 한국민을 위해 몸을 던진 아펜젤러에 대한 105년만의 보은(報恩)이었다.  


3.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 및 기념관의 규모와 역할

 

  400평 규모의 기념교회는 1902년 아펜젤러가 타고 가다 사고로 침몰한 배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교회 안에는 교회동을 비롯하여 아펜젤러순교기념관, 선교비전센터와 숙박동 등 총4개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펜젤러선교사를 기념하는 예배당은 200석 규모이며 예배와 각종 세미나를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아펜젤러의 일대기를 감상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교회 안에는 그의 어린 시절과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최후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과 기록, 그림 2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게스트하우스는 아늑한 공간으로 2인실, 4인실, 6인실로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숙박할 수 있으며 욕실과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다.  그리고 기념관과 숙박시설을 이어주는 공간에 자리 잡은 아트리움은 작품을 전시하거나 작은 음악회 등을 개최할 수 있고, 탁 트인 자연을 바라보며 커피와 각종 차를 마시며 교제할 수 있는 카페가 있다.  

 

 

 



  또한 하늘공원은 갈대공원과 아름다운 고군산열도의 비경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토론회나 발표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하다. 또 식당은 인공 폭포수를 바라보며 100여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다. 

  이제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는 모든 교인들에게 시설을 개방하고, 감리교회 역사 교육 및 아펜젤러 순교 탐방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고 있으며, 국내외 선교사의 쉼터로도 활용하도록 하였다. 순교현장에서 순교의 정신을 확인하고 그 숭고한 삶을 기리는 것, 그리고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봄으로써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순교의 열정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탐방 문의 :  063-467-2478 ) 

 

 



  기념교회의 하늘공원에 올라보니 갈대공원 너머로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보였다. 새만금방조제로 물길이 막혀버린 서해 갯벌은 폐사한 조개 무덤으로 허옇게 바랬지만, 그 방조제 너머 보이는 바다가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어청도 앞바다이다. 어청도 앞바다는 기념교회가 들어서기 2년 전 2005년 6월11일 감리교단에 의해 해상 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이곳에 서니 뒤늦게나마 감리교단에도 성지가 마련되었다는 자부심이 옷깃에 스미는 바람처럼 일었다. 

 

꽃재교회 장로부부연수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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