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기는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리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와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 《남자를 위하여》(1996) 수록
◎시어 풀이
*한계령(寒溪嶺) : 높이 1,004m. 대청봉과 그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 주 능선의 안부이며,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룸. 설악산을 넘어서 인제군이나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되던 험한 고개.
*고립(孤立) : 외따로 홀로 떨어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겨울 한계령에서 폭설을 만나 고립되는 가상적 상황을 설정하여 고립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머물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은 한 번쯤 상상해 봤을 것이다. 우리에겐 가끔 삶의 일탈이 가져오는 새로운 긴장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무의식이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무의식과 이미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한계령은 해마다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는 곳이다. 1연에서 화자는 눈 덮인 아름다운 한계령에서 폭설에 고립되는 상상을 해 본다. 여기서 ‘고립’은 일반적이고 현실적인 속박의 의미가 아니라 운명적이고 낭만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2연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고립을 ‘오오, 눈부신 고립’으로 예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이라고 열망한다. 즉, 폭설로 인해 고립되고 싶다는 진술은 보통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못 잊을 사람’과 함께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와 함께 풍경이 아름다운 한계령에서 고립되는 일은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폭설로 덮인 한계령을 ‘동화의 나라’로 표현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화자가 긍정적으로 인식하여, 이 ‘동화의 나라’에 기꺼이, 운명이 묶였으면 희구하고 있다.
이러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는 3, 4연에서 드러난다. 고립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지고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오더라도, ‘헬리콥터’ 구조하러 오더라도 ‘결코 손을 흔들지 않’고, 운명이 통째로 발 묶인 그 숨 막히는 고립 속에서 먹이를 뿌리는 구원의 손길도 마다하고 기꺼이 묶이길 원한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완전히 고립되는 것이 좋다는 화자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고립되기를 원하는 원인은 마지막 5연의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남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계령에 고립되는 것은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식은 화자가 고립된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큼 사랑의 완성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않으리’, ‘모르리’ 라는 종결어미를 사용함으로써 화자는 자신의 굳은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폭서로 뒤덮인 한계령을 빌어 한계를 뛰어넘는 동화의 나라에서의 ’완전항 사랑‘과 ’자유‘를 갈망한다.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이기를 바라는 이 역설적인 ’고립‘을 마다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사람과 운명으로 묶이고 싶은 소망에 갈를 보내고 싶다.
▲작자 문정희(文貞姫: 1947 ~ )
여류 시인.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또, 서정을 주제로 하여 불교 미학의 순수성을 우리말로 표현하여 보다 애송적(愛誦的)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집으로 첫 시집인 《꽃숨》(1965) 이후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7), 《우리는 왜 흐르는가》(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이 있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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