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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새떼 / 문정희

by 혜강(惠江) 2020. 5. 20.

 

 

 

새떼

 

- 문정희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 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 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 시집 《새떼》(1975) 수록

 

◎시어 풀이

*포효(咆哮) : ①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음. 또는 그 울부짖는 소리. ② 사람·자연물 따위가 세고 거칠게 내는 소리를 비유한 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하늘을 날으는 새떼를 보며 시인이 펼친 단상(斷想)을 담고 있다. 실제로 시 속에는 새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새떼의 날아오름을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들이 시의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1연에서는 `흐른다'는 서술어를 통해 하나로 모아지며, 2연에서는 `오른다'`간다'의 의미망 속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모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流動)의 속성을 지닌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사뭇 감탄조의 고조된 목소리로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1연의 첫 시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이 진술은 강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흐름의 행로(行路)에서 예외적이지 않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생명의 상징인 `'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자연물의 상징인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지상 위의 많은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화하여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 모르게 출발하였어도, 대다수의 존재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동양의 전통적인 순환론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모든 만물은 하나라는 일원론적 세계관과도 맥이 닿아 있다.

  흐른다는 것은 시간과 궤를 같이하여 변화한다는 뜻이다. 흐르는 동안 시간은 우리를 지나쳐 사라진다. 한 번 지나가면 기억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 중 몇몇의 시간은 지워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 삶의 소중한 의미를 형성하게 되며, 그 눈부신 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빛으로 포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시인의 시선 가득 지금 새떼가 날아오르고 있다.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 빛으로 포효하며 / 오르는 사랑', 이것이 바로 시인 문정희가 새떼의 날아오름을 보며 얻은 깨달음의 내용이다. 시인은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하늘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고 있다기보다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이 시인이 의도한 뜻에 더 가까울 것이다.

  새떼가 비상(飛翔)하는 순간적인 광경에서 존재의 참다운 존재 방식을 읽어내는 시인의 예리한 직관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최동호: <한국의 현대시>)

 

▲작자 문정희(文貞姫: 1947 ~ )

  여류 시인.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또, 서정을 주제로 하여 불교 미학의 순수성을 우리말로 표현하여 보다 애송적(愛誦的)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집으로 첫 시집인 《꽃숨》(1965) 이후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7), 《우리는 왜 흐르는가》(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2004) 등이 있 다.

 

<해설 및 정리>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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