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시어 풀이
*니르바나(nirvāna) : 산스크리트어로서 ‘열반1(涅槃)’의 뜻. 일체의 번뇌를 해탈한 최고의 높은 경지.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불가해(不可解)한 : 이해할 수 없는.
▲이해와 감상
‘성에꽃’은 추운 겨울 새벽 유리창에 서린 성에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인간도 성에처럼 시련을 극복하고 난 후에야 가장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추운 겨울 새벽 유리창에 서린 ‘성에’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인간의 삶에도 ‘성에’처럼 시련을 극복해 낸 후에야 가장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에의 모습을 인간의 삶에 유추하여 적용하고 있는 이 시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시적 대상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도치법을 사용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의문형 표현을 통해 화자의 문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1행에서 9행까지는 화자가 추운 겨울 새벽녘 창가에서 성에를 발견하고 황홀해 한다.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라는 것은 유리창에 피어난 성에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화자의 영탄과 감탄을 드러낸 것이다. 화자는 이어 성에를 누군가가 밤사이에 피워 놓은 ‘투명한 꽃’에 비유하여, 설의적 표현을 통해 성에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화자는 유리창에 핀 성에꽃을 ‘투명한 꽃’으로 드러낸 뒤에, 문득 그 ‘투명한 꽃’은 겨울의 황량하고 혹독한 상황에서 피었다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니르바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열반’을 의미하며,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로서, 그 경지에서 핀 꽃이라면, 성에꽃을 바라보는 황홀함과 아름다움의 최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스러지는’에서 보듯이, 성에꽃이 아름답기는 하나 겨울 아침에 잠시 나타났다 금방 물방울로 변하는 순간성을 지녔기에, 더욱 눈부시고 아름답게 보였으리라.
이렇게, 겨울 새벽 유리창에 서린 ‘성에’를 보며 시련을 이겨 낸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해 하던 화자는 10행에 와서 ‘허긴 사람도 그렇지’라며 인간의 삶에 적용한다.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라고. 즉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이겨냈을 때 삶의 절정을 맞이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13행~19행에서, 성에꽃은 오랜 고통과 슬픔이 지난 후 얻게 되는 새로운 희망임을 인식한다.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 듯이’는 성에꽃을 비유한 ‘새하얀 신부’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으로, ‘새하얀’ 색과 ‘붉고 푸른’ 색의 대비와 의인법으로 표현한 것이 돋보인다. 그리고 성에가 ‘슬픈 향기’를 지녔다는 것은 고통의 밤을 겪은 결과물이므로 그 안에 슬픔을 지녔다고 본 것이며,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라고 한 것은 잠시 나타났다 한 방울 물로 사라지는 성에의 순간성 때문일 것이다. 비록 성에가 곧 한 방울 물로 스러질지라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는 화자는 그 성에의 모습 속에서 시련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가 갖는 삶의 가치를 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자 문정희(文貞姫: 1947 ~ )
여류 시인.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첫발을 내딛였다. 그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또, 서정을 주제로 하여 불교 미학의 순수성을 우리말로 표현하여, 보다 애송적(愛誦的)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시집으로 첫 시집인 《꽃숨》(1965) 이후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이 있다.
*해설 : 남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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